예수님은 효자였을까? (눅 2:48-51)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할렐루야~! 오늘도 주일 예배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의 삶 속에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평화가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옆에 게신 분들과도 함께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잘오셨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은 마더스 데이입니다. 또, 한인교회에서는 오늘을 어버이 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들어오시는 길에 자녀를 가지신 모든 분들은 남녀 구분 없이 이 카네이션을 받으신 줄로 압니다. 자녀는 없더라도 부모님이 없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바로 이 부모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동양에서는 효라는 개념으로 부모님을 섬기는 자녀들의 마땅한 도리를 강조해왔습니다. 성경에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십계명 중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첫번째 계명으로 강조하고 있고, 또, 신약에서도 장수의 약속이 있는 첫계명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오늘은 흥미로운 질문과 함께 설교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가 평생을 통해단 한명을 닮아가야 한다고 한다면 그 한명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은 과연 효자였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효자였을까?

과연 예수님은 효자였을까요? 언뜻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올 것 같은 질문이지만 복음서를 읽다보면 때로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여자여”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존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이기는 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 형제, 자매를 놔두고 자신의 따르던 제자들을 보면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곧 내 어머니요, 형제, 자매”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예수님은 효자였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되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홀로 성전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는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2장의 마지막 부분 역시, 읽고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본문니다. 이 본문의 내용은 어찌보면 유명한 크리스마스 영화 “나홀로 집에”의 예수님 버전처럼 보입니다. “나홀로 집에”라는 영화에서 장난꾸러기인 주인공 소년 케빈은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동안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고, 가족들은 그 케빈을 찾으려고 먼 길을 돌아옵니다. 예수님 역시 12살이 되던 해에 부모와 함께 유월절 관습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혼자 예루살렘 성전에 남으시게 됩니다. 많은 친척, 일행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일행 중 어딘가에 끼어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이나 갔다가 비로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줄 알게 됩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기 위해 사흘 동안이나 헤매다가 사흘 째 되는 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야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예수님의 부모는 삼일 동안 지옥 같은 하루 하루를 보냈겠지만, 우리의 예수님은 아주 잘 지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교사들 사이에서  말씀을 나누고 계셨고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의 지혜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으로 읽은 누가복음 2장 48절부터 5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줄 알고 3일 동안을 정신없이, 근심하며 찾아해맸던 예수님의 부모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감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놀람, 안도, 원망, 화,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48절입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

이러한 어머니의 책망 섞인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49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일반적인 자녀라면 ‘부모님께 염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많이 걱정하셨죠? 제가 성전 안에서 율법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고 용서를 구하는게 마땅한 상황인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난 대답입니다. 만약 이런 대답을 한 사람이 예수님만 아니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말썽꾸러기에다가 반항기가 충만한 청소년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살펴봤을 때에는, 예수님은 결코 효자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은 바로 51절 상반절에서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절)

51절에 나오는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는 단어는 원어인 헬라어로 ‘휘포타소메노스’이고 그 뜻은 상대방의 권위에 대해서 인정하고 그 밑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와 같은 단어를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의 권위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상반절의 말씀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에서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신다”는 단어가 바로 휘포타쏘, 본문의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에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만물이 복종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이 단어와 같은 단어를 예수님께서 그 부모님께 순종한다는 의미로 본문에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복종해야 하는 정도로 예수님은 부모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에 대한 순종의 정도, 권위를 인정하는 정도가 어떠하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52절에 나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부모에게도 효도하셨던 효자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 그 누가 과연 예수님처럼 부모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만물이 그 주인이신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처럼, 부모님의 권위를 완전히 인정하면서 받드는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효도를 하셔도 정말 제대로 하셨던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굳이 그렇게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 큰 도전을 줍니다. 2가지 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

  1. 첫번째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이부터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9절에서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계시면서 ” …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육신의 부모님들께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그러한 예수님의 자기 인식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옛부터 계셨던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처음과 끝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모보다 더 오랜 전부터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요한복음 5:5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고 그 사실을 예수님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또한 동시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에수님은 태초에 계셨고 천지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에 반해서 예수님의 부모는 피조물이었습니다. 하나님, 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누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그 답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 육신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에서 순종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요셉과 마리아가 창조주이신 예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들보다 더 훨씬 더 크고 높은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유가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을 하시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처럼 우리가 부모에게 꼭 순종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를 묻게 만드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보다 머리가 좋고, 우리의 부모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고, 우리의 부모님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더 많은 것을 이루었으며, 더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보다 더 신앙이 좋고, 더 영적으로 성숙했고, 더 하나님과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께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이 마땅히 존경할 만한 어떤 부분들이 있으면 순종하겠지만 그런 부분을 찾지 못할 때는 순종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힘이 있고, 재산이 있으시고, 건강이 있을 때에는 부모님께 순종하지만 그것을 하나 하나 잃어가시면서부터는 부모님을 무시하는 일들이 종종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조차도 예수님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러한 수많은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순종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누구라도,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 우리의 부모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는 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부모님께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부모님께 순종하셨음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는 또 다른 한가지 면이 있습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

  1. 그것은 예수님과 예수의 부모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부모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헤맸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질문은 바꿔말하면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죠?”라는 질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죠? 제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있을 것을 정말 모르셨나요?”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사에게 모든 것을 전해들었던 예수님의 부모가 그 기적적인 출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부모 역시 여전히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50절입니다.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50절)

예수님의 부모는 실제적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오늘 본문의 사건 속에서도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가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놀랍고 거대한 것이어서 아기 예수님을 길렀던 부모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50절의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 51절에 예수님께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받드셨다는 말씀입니다. 50절과 51절의 두 문장 사이에 들어갈 만한 접속사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전히? 예수님은 부모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도 그런 부모의 몰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모님께 순종하셨음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에는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생각에 대해서, 상대방의 이야기에 대해서 이해가 있어야지 그리고 설득되어야지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순종하기를 거부합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순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살아온 삶, 서로가 살아온 세대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온 세계, 내가 살아온 세계 속에서 당연했던 가치관, 세계관과 나의 부모가 살아온 세계, 나의 부모가 살아온 세계 속에서 당연했던 가치관, 세계관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급격하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이러한 세대 간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세대 간의 갈등 역시 유사 이래 최고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도무지 우리의 부모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부모들은 “도무지 내 자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의 일반적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둘 중 하나입니다. 무시하거나 싸우거나. 만나서 열심히 싸우거나, 만나지 않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른 행동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모와 함께 내려가셔서 그 부모님을 순종하고 받드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모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우리와 우리의 부모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 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부모를 무시하거나, 부모와 부딪히기 보다는 순종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셨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51절 하반절에서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었던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했을 때 서로에 대한 이해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할 때에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게 될 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왜 순종하셨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도대체 왜 예수님은 이렇게 까지 순종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우리는 다른 어디서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만을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분들이 예수님을 낳고 아기 예수님을 길렀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육신의 부모님께서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은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태아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10개월간 머물다가,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갓난 아기 시절과 젖먹이 시절을 거치고, 영유아기를 지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아기처럼 이 시기에는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써 부모의 도움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모든 아기들보다 좀 더 성숙한 아기였다고 한들, 인간이라면 당연히 거쳐야 하는 이런 시기를 분명 거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예수님을 위해서 낳고 돌보고 기른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예수님은 마땅히 해야할 것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아내가 아기를 낳고 또 아기를 기르는 것을 보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기는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것은 아기를 뱃속에 품으며, 고된 입덧과 허리통증과 숨가쁨을 참아낸 산모의 10개월 간의 인내가 있었다는 것이고, 남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해산의 고통을 당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영유아 시절을 지나서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 밖에 없는 아기를  밤잠을 설쳐 가면서 먹이고 트름 시키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옷을 입히고 씻기고 또 재웠던 부모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비록 어려서 부터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조차도 태어나고 젖을 떼기 까지 희생한 부모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증명하는 것이 바로 우리 부모님이 나를 위해서 고생과 희생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보이셨던 본대로 우리도 우리의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에베소서 6:1)

바울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고 단정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부모가 존경할만하면, 부모가 이해될만하면 순종하라는 조건 같은 것은 붙어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옳은 일, 예수님께서 본으로 보여주신 그 일, 그것은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이미 늦었습니다. 나의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하고 싶지만 순종할 분이 안계십니다 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도 우리의 영원한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순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게 되고 수많은 부모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우리의 교우 어르신들, 다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님이 되십니다. 우리가 순종하고 받들어야 할 대상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본을 따라 우리의 부모, 육적인 부모, 영적인 아버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모된 모든 교우들에게까지 순종하며 받드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