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2-14/왜 은혜인가

160508 주일설교

 무엇이 다른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마주합니다. ‘목사님, 뭘 믿든지 착하게만 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굳이 종교가 없어도 착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꼭 기독교를 믿어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공감하는 교인들도 적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종교인이나 무신론자라도 나못지않게 선하게 살고 반듯하게 잘 사는 사람에게 굳이 전도해야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독교인이 되고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선하게 살려는 비기독교인들을 꼭 전도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의문은 선하게 살려는 것과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무엇일까요?

지난 주에 우리는 복음에의 도전에 대한 바울 사도의 답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죄 지으며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 않느냐? 이에 대해 바울은 답하기를, 절대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참 성도는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연합하여서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함께 죽었고 부활의 때에 새사람으로 살아났으며 그 결과 죄의 권세에서 자유를 얻고 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의의 백성이 된 성도는 더 이상 죄를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해서도 안 된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된 성도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왕노릇하려는 죄에게 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12절입니다.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 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고

집을 한 채 샀습니다. 기쁜 마음에 방방마다 문을 열어보는데 집을 판 옛 주인이 한 방에서 자고 있는 겁니다. ‘당신 여기서 지금 뭐하는 겁니까?’ ‘아, 예. 이 집이 참 넓고 편해서 떠나기가 싫네요. 같이 좀 살면 안 되겠습니까?’ ‘아, 그러세요. 그럽시다. 뭐. 집도 넓은데.’ 이러실 분이 있습니까? 이미 성도의 삶에서 패배하고 권세를 잃어버린 죄가 여전히 떠나지 않고 남아서 육신의 정욕으로 우리를 사로잡으려 하는데 그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 집의 모든 소유권을 주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다시는 옛 여자 친구쪽은 돌아도 보지 말고 아내에게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시간과 돈과 정성을 모두 아내에게 쏟아야 합니다. ‘여보, 내 수입의 90%는 당신 주잖아. 10%는 옛 애인에게 줘도 되지 않겠어?’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듣고 있을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더 이상 죄에게 주지말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꼭 같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방 열쇠를 주님께 드리고 주님만 사랑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법 아래 삶과 은혜 아래 삶

바울의 이런 권면을 들으며 오늘 서두의 질문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아니, 결국 바울도 하는 말이 죄짓지 말고 의롭게 살라는 것이네. 이런 명령이야 다른 종교인들도 다 듣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 다른 종교와 기독교가 무엇이 다른가? 착하게 살라는 것은 다 같은 말 아닌가?’ 바울은 단호하게 같지 않다고 합니다. 14절입니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여기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등장합니다. 법 아래의 삶과 은혜 아래의 삶입니다. 이 구분에 의하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는 유대교, 계명을 지켜 천국에 가는 이슬람, 8정도를 따라 열반과 극락에 이르는 불교, 수행을 통해 목샤에 이르는 힌두교혹은 양심을 따라 삶으로써 인간답게 산다는 휴머니즘은 모두 법 아래의 삶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기독교는 은혜 아래의 삶입니다. 이 법 아래의 삶은 은혜 아래서의 삶과 어떻게 다릅니까? 바울은 왜 법 아래서 살지 않고 은혜 아래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인간의 의로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는 율법

첫째, 법은 인간의 의로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아 구원의 길을 못 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법이 누더기같은 인간의 의로 보석같은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습니다.

법은 우리를 속입니다. 어떻게 속입니까? 법은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물으면 그래야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고 천국 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우리도 똑같이 자녀들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울지마, 그래야 착한 아이지. 죄 짓지 마, 선한 일 해, 그래야  선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천국 가지. 바로 이것이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고 천국에 이를만큼 의로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의 선함과 의로움은 바닥이 났고 우리의 노력으로 절대 회복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세계 최고가의 집은 얼마쯤 할까요? 스위스에서 세계적 디자이너와 보석공예가가 함께 만든 집이라고 하는데 공룡화석과 유성으로 짓고 거의 순금으로 도배를 했다고 합니다. 가격이 무려 13조원, 100억불이 좀 넘습니다. 연봉 10만불인 월급장이에게 자 열심히 저축하면 저 집을 살 수 있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를 속이는 것이 아닙니까? 딱 1만 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저축해야 그 돈을 모을 수 있습니다. 속이는 것이지요.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화폐가치를 고려하면 미국 근로자들이 최고 임금을 받던 시기는 1973년이라고 합니다. 그 때까지는 미국경제의 생산성 향상의 과실이 그대로 근로자들의 임금향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경제는 과거처럼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며 계속 성장해왔는데 근로자들의 임금상승율은 생산성 상승율에 훨씬 미치지 못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근로자들의 소득은 오히려 감소한 것입니다. 그러면 생산성 향상의 과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인구의 1%도 안 되는 수퍼 부자들의 자본소득으로 다 돌아갔습니다. 1970년 대에는 1%의 부자가 생산되는 부의 50%를 벌어들였는데 이제는 90%를 벌어들입니다. 그런데도 막대한 자본소득의 세금은 줄여주고 그 부족분을 근로소득에서 다 거둬들입니다. 그 결과 1970년 대에는 아빠 혼자 벌어서도 아이들 학교 보내고 집 사고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부부가 다 달려들고 아이들까지 아르바이트를 해도 그 때보다 못 삽니다. 비정규직과 88만 원 세대가 양산됩니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이렇게 가난하지? 정치인들과 대중선동가들은 말합니다. 너도 저 수퍼부자들처럼 열정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의적으로 일해 봐, 그러면 저런 부자가 될 수 있어. 네가 부자가 되지 못 하는 이유는 결국 저들처럼 하지 못 한 네 잘못이야. 뭐하는 겁니까? 속이는 것이지요.

2006년 론다 번이 써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시크릿, 전 세계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법칙’이란 책은 왜 1%의 부자가 96%의 부를 벌어들이는가는 질문을 던지고 답하기를 그들이 끌어당김의 법칙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며 부자가 된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그 꿈이 실제가 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가난한 이유는 부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믿지 못 했으며 부자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의하십니까? 1970년 대 근로자들은 오늘날 근로자들보다 더 부자가 되기를 원했고 더 긍정적이고 더 부자처럼 행동해서 잘 살았던 것입니까? 이런 거짓말을 오프라 윈프리같은 유명인이 자신의 쇼에서 놀라운 책이라며 추천하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젊은이들의 필독서라며 추천했습니다. 대중을 속이는 것입니다.

법은 우리에게 네가 열심히 선행하면 착한 사람이 되고 엄격하게 죄를 멀리하면 의로워져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반면 은혜는 우리에게 인간의 의는 실패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모든 죄값을 다 치르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고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참된 의입니다. 법은 누더기 같은 인간의 의를 내세워 죄인이 보석 같은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에 법 아래서 사는 삶은 참된 구원의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사는 자 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여 의롭게 되고 천국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은혜 아래 살면서 하나님의 참된 의를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형식적 의로 참된 의를 가로막는 율법

둘째, 성도가 법 아래가 아닌 은혜 아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법이 형식적 의만 양산하여 참된 의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1964년 뉴욕에서 20대 여성 kitty Genovese가 퇴근하다가 자신이 살던 아파트 앞에서 강도를 만나 30분 동안 사투를 벌이다 결국 살해당했습니다. 이 사건이 당시 뉴욕시민들을 충격에 빠뜨린 이유는 그 아파트 40가구의 주민들이 그녀의 고함과 비명 소리를 30분 동안 들으면서 아무도 나와서 도와주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귀찮고 위험한 일에 연루되기가 싫어서 혹은 누군가 도와주겠지 하는 생각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이런 현상을 제노비스 신드롬 혹은 방관자 효과라고 부릅니다.

자, 이 사건에의 죄인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강도지요. 그러면 지켜만 보고 있던 40가구의 주민들은 아무 죄가 없습니까? 아무도 그들이 의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이 그들을 체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들은 형사법에 저촉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법의 한계입니다. 법은 형식적인 의 밖에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의는 형식적 의가 아니라 내면적인 의입니다. 주님은 마음의 정결과 마음의 사랑을 가르치시고 반면 마음의 더러움과 마음의 미움이 실제의 부정과 살인 못지않게 무서운 죄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법은 이런 내면의 의를 가르치지도 이루게 하지도 못 합니다. 겉으로는 이웃을 돕고 있어도 마음으로 그를 멸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의가 아니지만 법은 행동만을 판단할 수 있기에 이런 행동의 의로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 아래 사는 이들은 이런 형식적인 의를 행함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게 되고 이것이 참된 내면의 의에 이르는 길을 가지 못 하게 만듭니다. 또한 형식적으로 죄를 짓지 않음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여 마음이 음란과 탐욕과 허영으로 썩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 합니다. 기부하고 봉사한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자신이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깨닫지 못 합니다.

반면 은혜 아래 사는 이들은 법의 요구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 자유는 이제 법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가 아니라 법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의를 구함으로써 법의 요구는 저절로 이루게 되는 자유입니다. 가정부를 고용할 때는 계약서를 써야 합니다. 얼마 주고 대신 무슨 무슨 일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나 결혼할 때는 계약서를 쓰지 않고 사랑의 맹세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은 어떤 계약서도 쓰지 않았지만 어떤 가정부보다 헌신적으로 가정을 돌보고 어떤 일꾼보다 헌신적으로 집을 고칩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하는 참된 의입니다. 은혜 아래 사는 삶은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 감격하여 역시 온 마음을 다하는 사랑으로 그 분만을 섬기는 삶입니다. 이 삶이야말로 참된 의의 삶이요, 참 자유의 삶입니다. 은혜 아래서 이런 사랑과 자유의 삶을 사시기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