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7-30/탄식과 소망

160703 주일설교

 고난과 영광(17-18)

제 아내는 세 자녀를 출산할 때마다 해산의 고통때문에 더 이상은 자신이 없다고 말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 기쁨이 너무 커서 어느 새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리고는 둘째를 기대하고 셋째를 기대하여 벌써 셋째 아이까지 키우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녀가 주는 기쁨이 해산의 고통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고통 없는 삶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에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가 고난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대체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가장 확실하고도 빠른 답을 주는 단어로 저는 해산의 고통을 들고 싶습니다. 해산은 엄마에게 엄청난 고통이자 두려움이지만 이 고통이 없이는 생명을 낳는 위대한 일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어머니들이 해산의 고통을 거부했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또 이 해산의 고통을 거부한다면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다음 세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은 영광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고 영광은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소리 높여 강조하는 바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롬 8:17)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문제는 우리 모두는 장래의 영광을 보지 못 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밖에 못 보는 두더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탄식이 가득합니다.

 

피조세계의 탄식(19-22)

오늘 본문에는 세상에 가득한 세 가지 탄식을 소개합니다. 그 첫째는 피조물의 탄식입니다. 22절입니다.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세계는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파괴와 남용과 착취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삼림의 80%는 이미 파괴되었으며 지금도 매 2초마다 축구장 하나의 면적에 해당하는 숲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구의 마지막 허파로 여기는 인도네시아 원시림의 70%, 아마존 밀림의 20%는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환경파괴는 지구온난화, 엘리뇨와 라니냐 현상을 가져와 전 세계적인 이상기온과 산불과 태풍, 가뭄과 흉년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 서부의 여러 주들에서는 매년 여름마다 반복되는 산불로 헤아릴 수 없는 지역이 잿더미로 변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는 폭풍우로 14명이 죽고 수백 채의 집이 무너졌습니다. UN환경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구상의 사막을 제외한 지역의 70% 땅에서 사막화가 일부 혹은 상당부분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재앙은 끝도없이 들 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재앙이 시작된 것일까요? 20절을 보십시오.

(롬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습니다. 지금도 인간의 탐욕과 무지는 땅을 계속해서 저주하고 있습니다. 피조세계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관리자가 되었어야 마땅한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인해 오히려 재앙을 겪으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 관리자가 본연의 임무를 깨닫고 제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19절과 21절입니다.

(롬 8: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인간이 타락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을 되찾아야 피조세계도 따라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탄식(23-25)

두 번째 탄식은 성도의 탄식입니다. 23절입니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의 영혼은 성령을 받음으로 전에는 몰랐던 의와 거룩과 평안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죄와 악과 고난과 절망으로 뒤덤벅이 되어 계속해서 우리가 의와 거룩과 평안을 누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탄식하면서 우리 몸의 완전한 구원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는 로마서 7장의 탄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탄식하며 바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24절입니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성도가 참으로 바라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지금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는 데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25절입니다.

(롬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 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인내로 견디며 바라는 것이 우리처럼 믿음없는 이들에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바로 이런 이유로 세 번째 탄식인 성령님의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성령님의 탄식(26-27)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 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무지해서 무엇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지를 모르고 엉뚱한 것만 구하며 고생하며 탄식하며 삽니다. 그런 우리를 안타깝게 여기시는 성령님도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이 무지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듯, 부모들이 고생하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령님의 간구는 정확히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롬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소망(28-30)

그럼 그 성령님이 간구하시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무지한 눈을 열어 보이지 않는 소망이 무엇인지 보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탄식이 기쁨으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령님의 간구로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는 알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는 현재의 고통마저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아주 유익한 재료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구원이라는 선한 뜻을 이루어가시는데 심지어 불필요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고난까지도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구원이 무엇인지도 29절 이하는 설명해 줍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들의 구원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미리 알고 계획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형제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어떤 것입니까? 30절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해 구원받도록 부름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존재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영화로운 존재가 됩니다. 의로움이란 성도의 영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영화로움이란 성도의 몸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흠도 티도 없는 거룩한 영으로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몸을 입은 그리스도의 형제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자, 바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성도의 영광스러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의 영광에 비하면 현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영광을 바라보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인내로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을 보지 못 하고 현실의 고난만 보면 탄식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이런 영광을 보게 되고 그 소망으로 인해 압도되어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탄식과 두려움이 아니라 비전과 기쁨으로 현실의 고난을 거뜬히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시선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현재의 고난입니까, 장래의 영광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오늘이 탄식의 어둠에 뒤덮힐수도, 기쁨의 햇살을 마주할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말할수없는 탄식으로 여러분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여러분의 눈이 열어 참되고 영원한 장래의 영광을 보실 수 있게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