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5/그치지 않는 고통

160714 광복주일설교

 

광복절의 근심

작년에 광복과 분단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고등신학연구원에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와 함께 기독교민족지도자 50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 ‘한반도에 울려퍼진 희망의 아리랑’을 출간하고 기념음반 ‘오라, 다시 민족을 노래하라’도 제작하였습니다. 이 책과 음악의 일부를 담은 영상을 유투브에서 ‘한국기독교민족지도자 50인’이란 제목으로 찾으실 수 있는데요, 이 시간 그 일부만 잠깐 보시겠습니다. (영상)

오늘은 광복 7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매년 광복기념주일과 교회창립기념주일이 겹쳤었는데 올해는 두 기념주일을 따로 기념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미국 Independence Day 독립기념일이 있다면 한국에는 8.15 광복절이 있습니다. 광복이란 단어는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해 쓰이다가 1948년 제헌국회가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부르기로 하면서 일반화되었습니다. 광복이란 단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빛을 회복하다는 뜻인데 일본제국에 빼앗겼던 주권을 회복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참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을 회복했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마냥 기쁘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광복 71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 한 것뿐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위안부 문제, 독도문제, 일본의 군국주의화, 일본식 교육과 제도를 답습하고 있는 현실 등을 생각하면 과연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이 맞으며, 마냥 기뻐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식민지 후유증으로 시작된 남북분단은 아직도 국토와 국민을 반토막 내 놓고 있습니다. 분단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모자라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새우등 터지는 꼴이 되어 있습니다. 경제성장으로 기뻐한 것도 잠시 한국사회는 양극화 문제로 전체 국부는 느는데 중산층은 붕괴되고 빈곤층만 늘어가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걱정과 탄식이 그치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럼 예수 믿는 신앙인들이 이렇게 걱정하고 탄식하며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염려는 주님께 다 맡기고 기뻐하고 감사하기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는 이들이 걱정과 탄식을 안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해 그런 것 아닐까요? 오늘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 답을 우리는 우리 중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을 갖고 살았고 늘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자신도 그렇게 실천하며 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과 고통을 떨치지 못 하고 살았던 한 인물, 바로 바울을 통해 들어보려고 합니다.

 

근심과 고통의 이유

로마서 8장까지 바울은 이신칭의로 요약되는 구원의 교리를 설명하고 성령 안의 삶을 설명한 후 9장부터는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를 꺼내듭니다. 동족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바울의 마음을 압도하는 감정은 근심과 고통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롬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그에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습니다. 왜입니까? 바로 동족에의 사랑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바울의 근심과 고통은 믿음 없음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이 이신칭의의 믿음 때문에 더더욱 동족을 위한 근심과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근심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분명 믿음을 가짐으로써 벗어버리는 근심과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 욕심으로 말미암는 근심과 고통입니다. 대신 믿음을 가짐으로써 새로 갖게 되는 근심과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의를 구하느라 겪는 근심과 고통입니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근심을 고린도서가 이렇게 소개해 줍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근심이 세상 근심인데 이것은 결국 우리를 사는 동안에도 괴롭게 하고 마침내는 멸망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반면 이 근심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느라 갖게 되는 근심은 우리의 영혼과 이웃의 영혼과 이 세대의 운명을 놓고 하게 되는 근심이며 이런 근심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함으로 너무나 큰 열매를 맺기에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거룩한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만 구하느라 지치는 세상 근심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거룩한 근심을 해야 합니다. 생명과 구원을 주는 거룩한 근심을 하는 이들이 되길 축복드립니다.

 

동족을 위해 목숨을 걸다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한 거룩한 근심 중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동족을 향한 사랑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해 심한 근심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 근심과 고통이 얼마나 큰지 가히 목숨을 걸 정도입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내가 저주를 받아 구원을 잃는 한이 있어도 내 동족들은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마치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내 자식만은 살려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마디로 목숨을 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보여준 구약의 지도자가 있습니다.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모세)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자랐습니다. 그가 침묵하고 살았다면 당대 최강제국의 왕궁에서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인에게 학대받는 동족들을 구하려다 살인자가 되고 도망자가 되어 청춘을 광야에서 왕궁에서의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비참하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아 민족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향하던 중 범죄한 동족들이 심판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신의 목숨을 겁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동족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나 신약의 바울은 모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됩니다. 하나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고, 이웃 사랑의 시작은 가족사랑과 동족사랑입니다. 내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며 남의 가족을 어떻게 사랑할 것이며, 내 동족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민족을 어떻게 사랑할 것입니까! 세상 모든 민족을 사랑하려면 먼저 내 동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동족을 향한 사랑으로 거룩한 근심을 그칠 수 없는 이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동족에의 자부심

동족사랑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동족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동족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으면서 동족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동족을 어떻게 여겼는지 보십시오.

(롬 9: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 9: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한 마디로 내 동족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와 그리스와 로마 등 고대의 내노라했던 제국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은 그저 늘 번갈아 점령을 당했던 약소국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자신들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인류의 종교와 사상사에서 그 어느 민족도 비견할 수 없는 위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전 세계 인구의 0.2%로 약 1,500만도 안 되는 수이지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민족으로 평가받습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23%가 유대인입니다. 다섯 명 중 한 명꼴이 넘는데 2013년에는 8명 중 6명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아이비리그 학생의 30%가 유대인입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진정한 파워가 유대인들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미국인의 2%가 안 되는 유대인들은 금융, IT, 언론, 영화 등 주요산업 전반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를 보유하는 파워그룹입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투자은행, 신문사, 영화사가 유대인 소유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민족에 대한 세계 최고 수준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증거 중 하나는 그들이 세계 어디에 살아도 민족정신과 언어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자녀교육의 특징 중 첫째가 기회가 될 때마다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다는 것입니다.

한인들이 2세만 되어도 한국말은 잊어버리고 학창시절에는 정체성 혼란으로 고통을 겪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가르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왜 자부심을 못 가르칩니까? 우리 마음에 자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자부심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런 자부심을 고백할 때에도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들이 독립을 누린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참된 자부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이 시대에 택함받은 제사장 민족이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택하신 족속이라’는 베드로서의 말씀이 그 첫째 증거이고, 교회 역사에 유래없는 대부흥과 큰 성장을 경험한 한국교회가 그 둘째 증거입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비록 그 위신이 추락해 민족을 깨우고 세상을 구원하는 이 사명을 감당해낼 지 의심스럽지만, 성도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말씀을 믿는 이들입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믿음의 선각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온 세상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되게 하는 이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민족이란 사실을 믿으시는 8.15광복 71주년이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