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4-18/예정하신 하나님

160828 주일설교

 예정론에 관한 오해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기독교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물컵을 손에 드시고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예정론이라는 것이 있어서 내가 지금 이 물을 마실지 말지를 다 하나님이 정해놓았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자, 내가 물을 마시겠냐, 안 마시겠냐? 교회 다니는 애들이 한 번 답해 봐라.’ 답답한 마음에 제가 손을 들고는 ‘선생님, 예정론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제가 예정론이 뭔지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저도 예정론이 뭔지 잘 몰랐기 때문에 그저 듣고만 있었습니다.

예정론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 중 하나이면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도 어느 교우께서 아주 자주 듣는 오래된 질문을 해오셨는데요, ‘목사님, 하나님의 예정이 맞다면 우리가 전도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것도 별 의미가 없지 않나요? 어차피 예정한 사람은 구원받고 예정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 할 테니까요,’ 이 질문 역시 앞선 담임선생님처럼 예정론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정론은 우리의 모든 삶이 과거에 이미 다 결정된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결정론이나 어떤 이는 구원받도록 미리 정해지고

어떤 이는 심판받도록 정해져있다는 운명론이 아닙니다. 그럼 예정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오늘 본문 로마서 9장은 흔히 이중예정론이라고 불리는 교리의 근거로 인용되는 본문입니다. 이중예정론이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미리 예정해 두셨다는 개혁교회의 전통교리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교회의 구원문제입니다. 이는 9장 전반부부터 바울이 다루어온 문제인데, 선택받은 줄 알았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여 진노 아래 놓이고, 진노 아래 있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이루고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참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바울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들의 항변이 그 시작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국민을 개, 돼지라고 칭한 고위관리가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만 유대인들이야말로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는데 자신들이 아닌 개, 돼지들이 하나님의 참 선택받은 백성이 되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선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도전하기를, ‘만약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셨다면 그건 하나님이 정말 불의하신 것이요.’라고 비난의 날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14절입니다.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해도 불의하다고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15절이 그 이유입니다.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여기 구원의 조건이 두 가지 등장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구원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안 되는데 그 긍휼을 누가 베풀기로 결정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오로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데 네가 왜 감놔라, 콩놔라 하느냐고 하십니다. 특별사면권을 어떻게 베풀지는 대통령이 고민할 문제이지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길 축복드립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진노가 아닌 긍휼을 베풀기로 하셔야 구원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긍휼도 베풀고 진노도 쏟아놓는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로마서는 시종일관 긍휼과 진노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이 진노를 압도하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긍휼도 베풀고 자비도 베푼다고 선언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류 모두가 입어야할 진노 대신 인류 모두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로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진노 대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긍휼함과 완악함

구원은 전적으로 이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구름과 긍휼의 구름이 만날 때 은혜의 비가 쏟아지고 구원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의지하지 않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원을 원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달음박질한 이는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인입니다. 그들의 자신들의 계획과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들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그들이 바로 자격없는 이방인이면서 교회가 된 성도들이요 곧 우리들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 한 채 자신들의 신분과 공로를 믿고 하나님의 긍휼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바울은 바로를 예로 듭니다. 그는 출애굽 때 당신의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악한 마음으로 끝까지 거부했는데 결국 그 완악함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온 세상에 보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17절은 바로 그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끝까지 복음을 거부한다면 만나게 될 운명입니다. 그들의 고집과 완악함은 그들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겠지만 그들의 완악함마저도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긍휼을 입는 이들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을뿐 아니라 완악하게 되는 이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여전히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구원도 심판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그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표현하는 구절이 18절입니다.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

전통적으로 이 18절은 앞서 에서와 야곱 중 야곱을 선택했다는 본문과 더불어서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이중예정론의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를 세웠고 그를 완악하게 하셨다는 식의 표현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오해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바로를 완악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완악한 바로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유명한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사 6: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본문은 마치 이스라엘이 깨닫는 것을 하나님이 두려워해서 눈과 귀를 막으시는 것처럼 표현됩니다. 그러나 전에도 설명드렸듯이 이는 백성들이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고침받기를 거부한 결과 들어도 못 깨닫고 보아도 알지 못 하는 상태가 되고야만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심판에 이르도록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완악하게 만드신다는 이해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보십시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마 5:45)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구원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와 심판할 자를 미리 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구원받도록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내 속죄를 이루셨고 성령을 보내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를 통해 지금도 복음을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구원과 심판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면 사도들은 ‘하나님은 예정된 사람만 구원하기를 원하신다’고 선언하고 ‘예정된 자들만 주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넘치는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 긍휼을 받아들이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이들은 그 자신의 죄의 값을 스스로 치르느라 공의롭고 공정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이 받게 된 긍휼은 헤아릴 수 없이 커서 그들의 어떤 노력이나 공로도 그 앞에서는 태양 앞의 촛불처럼 아루 존재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긍휼을 받아들이는 이나 거부하는 이나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모든 역사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 아래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정론은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모든 인류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에 의존하고 있다는 진리를 설명하는 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은혜와 구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여러분은 온전히 깨닫고 계시는지요?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크심과 자비로우심 앞에 무릎 꿇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