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0:5-13/쉽고 가벼운 짐

160925 주일설교 로마서

 무거운 짐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래 많은 서구지성인들은 종교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오히려 종교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세계종교인구 통계에 의하면 약 70억 인구중 무종교인은 14%에 불과하고 84%가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신교, 카톨릭, 정교회를 포함한 기독교가 30%로 최대종교였고 23%의 이슬람교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힌두교, 불교, 도교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세계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인 이슬람교도가 되어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일반적인 종교생활은 제쳐두고서라도 이슬람교도로서 구원을 받으려면 다섯 가지 의무를 빠뜨림없이 수행해야 합니다. 첫째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신앙고백인데 이건 말로 하는 것이니 쉬워 보입니다. 둘째 하루 다섯 차례 알라를 향해 기도하는 것인데 반드시 정해진 시간에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매일 평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벽기도만 해도 대단하다고 하지않습니까. 셋째 자선으로 전체자산의 2.5%, 교역품의 2.5%, 농업생산의 5-10%를 빈자에게 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십일조가 있지만 의무조항이 아니고 주정헌금도 마음대로 아닙니까? 넷째 단식으로 매년 라마단 기간 한 달 동안 해가 떠있는 시간에는 어떤 음식이나 음료나 쾌락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섯째 평생 한 번은 메카를 순례해야 합니다. 이슬람을 예로 들었으나 다른 종교들도 이 못지않은 이런저런 의무조항들이 있습니다.

이런 의무조항들을 보면 기독교인들은 참 신앙생활 쉽게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개인차가 있겠으나 기도생활, 기부, 단식 등만 봐도 교회가 평균적으로 요구하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엄격하고 가볍지 않은 것들입니다. 게다가 교회는 그런 요구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기에 압박감이 훨씬 덜합니다. 좀 속된 말로 우리는 이렇게 슬렁슬렁 신앙생활해도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 개신교의 요구사항은 타종교의 그것에 비해 훨씬 가벼워 보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이 요구하는 것의 차이점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

지난 주에 이어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의 차이에 대해 살펴 봅니다. 지난 주에는 왜 사람들이 믿음의 길과 율법의 길로 갈라지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율법을 지킨 사람들은 율법의 길을 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의를 믿고 의지한 사람들은 믿음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두 길이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먼저 율법의 길이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5절입니다.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레 18:5을 인용한 이 말씀의 의미는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결국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길이 실제로는 불가능한 길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10계명 외에도 이를 풀어서 적용한 248개 실천명령과 365개 금지명령이 있어서 모두 613개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10계명을 틀리지 않고 다 쓰실 수 있는 분이 10분의 일 쯤 될까요? 그런데 613개의 세부조항들까지 다 지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항들을 행동으로 다 지키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무엇보다 그 명령의 근본취지인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정결을 다 성취할 만한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율법의 길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미션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무거운 짐을 지고 살며 늘 죄책감과 패배감을 안고 사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마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무거운 짐이 바로 율법의 짐입니다. 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앙이 기쁨과 특권이 아니라 무거운 의무요, 부담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 하면 기독교인들도 이 율법의 짐을 지고 숨이 막히고 지치고 피곤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교우들의 간증을 듣노라면 종종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교회 출석하고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짐이었는지 몰랐다는 것과 이제 복음을 알고보니 그렇게 자유롭고 기쁠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율법의 짐을 벗고 주님께로 와서 쉼을 얻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믿음의 요구

그럼 주님이 주시는 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믿음의 길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요.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신 30:11-14을 인용한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가 내려오는 것은 성육신을 말합니다. 즉 믿음의 의는 인간이 의롭게 되기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한데 그 그리스도를 성육신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7절입니다.

(롬 10:7) 혹은 ‘누가 무저갱으로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모셔 올린다는 것은 그 분의 부활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일도 우리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죄인된 인간이 할 수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 불가능한 미션을 믿음의 길은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하늘에 올라가고 지옥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구원을 위해 앞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불가능에 가까운 온갖 의무를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길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8절입니다.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믿음의 길은 하늘과 땅밑과 같이 멀고 불가능한 곳에 있는 미션을 요구하지 않고 바로 우리의 입과 마음에 이미 주신 말씀에 주목하라는 미션을 요구합니다. 그 말씀은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전하고 있는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정리한 것이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이 성경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9-10절입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뭐가 이렇게 쉽습니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만 하면 된다고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길은 이 마음의 믿음과 입의 시인 딱 두 가지입니다. 성경은 새벽기도도, 십일조도, 금식도, 성지순례도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구원조건과 비교하자면 첫 번째인 신앙고백 뿐인 셈입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마음이란 우리의 육체성과 대비되는 지, 정, 의와 영을 포함한 전 인격을 가리킵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전적으로 예수가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 선포에 동의된 상태를 마음으로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한 젊은이가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그녀를 향하게 되고 다른 여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와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쉬운 듯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한없이 어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믿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안 된다고 성경은 또한 가르칩니다.

다음으로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구원의 삶은 혼자 마음으로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에 속하여 그 공동체와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사실상 마음으로 믿는 것의 외적 증거가 공동체적 고백과 헌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길 

다른 종교인들은 이런 성경의 요구를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어할 것입니다. 아니, 겨우 그것만 하면 구원을 받는단 말이야? 실제로 교회 밖에서 이런 구원의 가벼운 요구를 종종 비판합니다.

믿음의 길이 요구하는 이 두 가지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무엇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개척하는 구원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겸손히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 은혜라는 점을 다음의 구절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롬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경건한 기도생활과 적지않은 헌금, 금식과 같은 수행, 성지순례, 선교사역 같은 수고를 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주님은 구원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길은 부자도 빈자도, 배운 자도 못 배운 자도, 존귀한 자도 이름없는 자도 구별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린 은혜의 길입니다. 이 길은 무거운 의무의 길이 아니라 감사와 감격과 겸손으로 가는 쉬운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참 구원을 주지못하고 사람을 노예로 삼는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와 멍에를 함께 하시고 참 안식의 길, 기쁨의 길, 구원의 길 가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