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0/남은 자들의 소망

161009 주일설교 로마서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 아마 작년과 재작년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14년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 ‘명량’이 대히트를 하면서 유행한 대사입니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의 칠천량해전으로 조선수군이 궤멸하자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고 명령합니다. 선조와 더불어 조선 최고의 엘리트 관리들의 눈에 이미 수군은 끝장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라는 비장한 장계를 올립니다. 모두 이순신이 미쳤거나 소위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했지만 명량해전에서 실제로 이순신은 단 13척의 배로 2백여 척이 넘는 일본수군을 대파함으로써 조선수군의 부활을 가능케 합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단지 전투를 탁월하게 수행했다는 점에 있지 않습니다. 잘 싸우는 장군은 많습니다. 이순신은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발견케 하는 비전과 그 비전을 이루어내는 의지를 가졌다는 점에서 위대한 장수입니다. 이런 위대함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어야 마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꺾이는가

이제 우리는 로마서 11장으로 들어섰습니다.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이유와 그 결과 그리고 그들이 그 결정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은 설명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이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롬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이 모든 정황들을 볼 때 유대인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냐 혹은 하나님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표면적으로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으로 그들이 결국 버림받은 민족이 된다면 그들을 택하셔서 복을 주고 세상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인간의 불순종으로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다면 세상 욕망을 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려는 의인들에게는 절망의 소식이 됩니다. 가정을 세우려는 이는 배우자의 비협조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마주치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려는 이는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의 공격으로 양떼를 다 잃고 교회가 무너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걱정에 잠을 못 이룹니다. 공의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이는 부정과 부패와 불의의 세력들이 좀먹는 국가경제와 정치와 사회의 붕괴 앞에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는 것을 보며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로도 도랑을 흙탕물로 만들고 한 방울의 독으로도 한 통의 생수를 독물로 만드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항상 작은 악이 큰 선을 이기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현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울은 이 질문에 답을 합니다. 1절 후반부입니다.

(롬 11:1) …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자손이라.’ 

바울은 이스라엘이 버림받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두 가지 예를 드는데 그 첫째가 바로 자신입니다.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자신과 같은 존재도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백성이 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 모두가 복음을 거부한 것이 아니고 모두가 구원을 잃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좀 더 명확한 두 번째 예를 듭니다.

(롬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두 번째는 열왕기상 19장에 등장하는 엘리야의 이야기입니다. 두로왕의 딸이자 바알신앙의 전도자였던 이세벨과 결혼한 아합왕이 다스리던 북왕국은 배교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여호와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죽지 않으면 배교하여 바알숭배자로 돌아섰고 백성들도 그들을 따라 모두 우상숭배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민족 이스라엘은 끝났고 하나님의 나라도 망했다고 절망하며 주님께 이렇게 고발합니다.

(롬 11: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나 말고는 끝장났고 나도 이제 곧 끝장날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데 나는 누구와 힘을 모아 싸우겠습니까? 이제 나도 죽어버리면 누가 주님을 위해 싸우겠습니까? 주님, 이제 희망이 없지 않습니까?’ 그의 절망과 낙심을 우리는 자주 겪습니다. 주님, 우리 가정은 끝입니다, 우리 회사는 끝입니다, 우리 교회는 끝입니다, 우리 나라는 끝입니다, 아무도 의를 위해 사는 이가 없고 저도 더 이상은 이런 희생과 고난을 못 견디겠습니다.

 

남은 자 칠천 인 

엘리야가 했고 오늘 우리도 늘 하고 있는 이 탄식은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이성적 눈으로 현실을 볼 때 내뱉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 너머에 있는 초현실 즉 영적 세계를 보는 눈을 갖게 되면 탄식을 멈추게 하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는 새로운 현실은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롬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엘리야 혼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숨겨지고 남겨진 칠천 명이 아직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들을 보지 못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엘리야의 눈으로도 발견하지 못 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믿음의 눈은 세상의 지혜가 보지 못 하는 것을 보게 합니다.

남겨진 7천 명의 의인들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은 밑둥부터 잘려나가 죽어버린 나무의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입니다. 죽은 나무의 그루터기에서 새 싹이 자라나 새로운 나무가 되듯 그 남은 자들의 믿음과 헌신은 실패한 민족 이스라엘이 기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민족으로 거듭날 소망이 됩니다.

남은 자가 소망이 됩니다. 이 7천인이 민족의 소망이 되도록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4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롬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 칠천인을 택하셔서 남겨두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즉 7천 명의 신실한 사람들이 모여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기로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너무나 기쁜나머지 그들을 남기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7천 명을 택해서 그들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도록 만드셔서 민족의 소망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을 이기는 소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남은 자

소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도 엘리야의 시대와 마찬가지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로 부름받은 이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배교의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인이 있어서 민족의 소망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 이 세속화의 시대에 탐욕과 정욕과 허영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인으로 부름 받은 이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신실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로 교회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남아 있는 7천 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행위에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많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 은혜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은혜의 폭포수를 쏟는 샘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자신의 부족함만 보면 엘리야처럼 우리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남아있는 칠천 인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너진 가정의 그루터기, 흔들리는 교회의 소망, 쇠락하는 시대의 남은 자들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6절을 보십시다.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인생도, 가정도, 교회도, 민족도 그리고 이 시대도 소망이 필요합니다. 어디서 그 소망을 찾을 것입니까? 자격도 능력도 없는 이들을 남아있는 칠천 인으로 부르셔서 소망의 그루터기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음을 보고 칠천 인의 의인이 남아있음을 보고 소망으로 다시 일어서는 남아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격려해 주십시오. ‘남아있는 자였군요.’ ‘끝까지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