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5:22-29/먹구름을 뚫는 햇살

170108 주일설교 야곱의생애

 기대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가정이 비기독교인의 가정보다 더 도덕적이고 모범적이고 또 더 행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체로 그렇다고 믿습니다만 그렇지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정에서도 추문이 있고 부부간의 불화도 있고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고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이웃들로부터 비난받는 일도 종종 일어납니다. 그럼 추문과 불행의 먹구름에 뒤덮인 성도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여전히 비치고 있는 것일까요? 온갖 문제는 하나님이 더 이상 그 가정을 돌보고 있지 않으신다는 증거는 아닐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짙은 먹구름

우리는 다시 창세기로 돌아왔습니다. 로마서가 아니고요? 잊으셨을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2015년 8월까지 약 34주에 걸쳐 족장들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았는데요, 오늘 본문은 야곱의 생애 중 거의 마지막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 뒤에도 야곱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만 그것은 그 아들 요셉이 주인공이 된 사건의 조연으로서 등장합니다. 로마서 여행을 잠시 쉬면서 족장들의 삶 속으로 돌아가 잠시 함께 여행을 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의 가정사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와 그 어두움을 걷어내는 빛이 함께 드러납니다. 먼저 그림자를 보십시오. 22절입니다.

(창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비록 상대가 아버지의 후실이라고는 하나 장남인 르우벤은 족보상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저지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 부끄러운 일은 야곱의 아들들이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합니다. 바로 앞 34장에서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의 복수를 한답시고 부족 하나를 몰살시키는 학살극을 벌였습니다. 37장으로 가면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이 모든 부도덕은 모두 대가를 치릅니다. 시간관계 상 르우벤의 경우만 그 결과를 살펴봅시다. 창 49:3-4절은 야곱의 예언을 통해 르우벤과 그 후손들의 운명을 소개합니다.

(창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일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창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렵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은 장자로 태어났고 여러 가지 장점을 가졌으나 그 정욕을 다스리지 못 하여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 그가 누릴 수 있었던 복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런 약점으로 인해 그는 장자로서의 권위를 누리지 못 했습니다. 37장에서 요셉을 살리려고 했던 그의 의도를 동생들이 무시해 버린 것만 보아도 이런 점이 드러납니다. 그의 후손인 르우벤 지파 역시 이스라엘 역사에서 한 번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 한 채 비교적 일찍 소멸된 듯 합니다.

이 사건은 야곱 가정의 분열상도 잘 보여줍니다. 르우벤의 근친상간 상대 빌하는 누구입니까? 그녀는 야곱의 네 명의 아내 중 한 명이지만 르우벤의 어머니 레아의 평생의 경쟁자였던 라헬의 몸종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 했던 라헬이 남편 야곱의 사랑을 언니 레아로부터 빼앗아오기 위해 억지로 남편의 후실로 삼게하였던 것입니다. 레아와 그녀의 몸종 실바가 낳은 여덟 명의 아들들과 라헬과 그녀의 몸종 빌하가 낳은 네 명의 아들들 사이의 불화는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레아의 아들인 르우벤이 빌하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면 빌하의 아들들의 증오는 어떠했겠습니까? 배다른 형제간이지만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야곱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도 잘 드러납니다. 22절 후반부는 르우벤의 부정을 아버지 야곱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르우벤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지 모르지만 야곱에게 이는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입니까? 앞서 시므온과 레위의 학살극에서도 꾸짖는 야곱에게 두 아들은 오히려 뉘우치지 않고 대들 뿐입니다. 이 사건들은 야곱이 자녀들에게 얼마나 존경받지 못 한 아버지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또한 야곱의 가정이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이자 이웃인 가나안 족속들과 맺은 관계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좇아 살아가야 했던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가나안 족속들의 세속적인 삶의 방식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갈등을 이 가족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잔인한 복수로 이웃 부족을 몰살시키는 방식을 택합니다. 르우벤은 그들의 방식을 좇아 근친상간을 저지릅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방식에 굴복하거나 복수하는 방식을 택함으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을 주기보다 오히려 세상에게 부정한 영향을 받는 가정이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들을 시기하고 괴롭혔던 아비멜렉 부족으로부터 오히려 존경을 받으며 평화조약을 맺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야곱의 가정이 얼마나 형편없는 상태였는지가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야곱의 가정은 모범적 성도의 가정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 쯤 되면 과연 이 가정에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가정에서 이런 막장드라마가 펼쳐진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좇는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산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 가정의 현실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가정과 같았으면 좋겠지만 야곱의 가정과 같을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말 그런 때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먹구름을 뚫고 나온 햇살

막장드라마를 찍고 있는 야곱의 가정에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22절 후반부 이하를 보십시오.

(창 35:22)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창 35: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창 35: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창 35: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창 35: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온갖 추문과 문제에 휘말린 야곱의 열두 아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는 열두 지파의 조상들입니다. 이 열두 아들은 하나님이 당신이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증거입니다. 11절로 돌아가보면 하나님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 소개됩니다.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 약속처럼 열두 아들을 통해 열두 지파와 이스라엘 민족이 태어나고 위대한 왕들이 태어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고 야곱에게도 주신 바다의 모래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후손의 약속을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서 27절을 보십시오.

(창 35: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당시 지명 마므레, 후대의 지명 헤브론 이 곳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최종적으로 정착한 땅이고 이삭이 대를 이어 살아가는 땅이고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사서 지금은 이삭이 소유하고 있는 땅입니다. 이 땅은 그들이 장차 이 가나안 땅 전체를 소유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늘 상기시켜 주는 곳입니다. 일종의 담보물 같은 땅입니다. 야곱이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땅의 약속을 잊지않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다시 12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창 35: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것은 야곱의 가정이 막장드라마를 찍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가정에 비치는 희망은 이것 뿐 아닙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창 35: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창 35: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야곱과 함께 거하던 이삭이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장례를 위해 세일 땅에 살던 에서가 헤브론으로 와서 동생 야곱과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릅니다. 에서와 야곱이 나란히 자아례를 치르는 이 장면이 이 형제의 화해가 참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이미 에서와 화해를 했지만 그 화해가 참된 것일지는 야곱 자신도 의심했었습니다. 자신의 권리와 복을 사기로 빼앗아간 동생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원한이 얼싸않고 한 번 울었다고 다 풀렸을까? 그 화해가 일시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되었을 법합니다. 그러나 이 아버지의 장례 장면에서 그 화해는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해는 후에 요셉이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을 재현됩니다. 이 화해의 장면은 모든 어그러진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요셉의 가정에 드리우는 빛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원수된 길로 갔던 죄인들이 화목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고편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증거들은 하나님이 야곱의 가정을 버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시고 여전히 돌보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먹구름으로 뒤덮힌 야곱의 가정에 소망의 빛을 던져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먹구름이 아무리 짙어도 그 구름 뒤에 태양이 떠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듯이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성도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죄와 미련함이 망친 성도의 가정을 하나님은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인간의 죄와 악이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서와 치유와 회복의 길을 가는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