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7:12-28/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170219 주일설교

 

악의 평범성

예전에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다시 한 번 인용하고자 합니다. 히틀러의 심복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내 학살한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 그녀는 그의 평범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살범에 걸맞는 흉악하고 악독한 모습을 기대했던 그녀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옆집 아저씨처럼 어수룩한 아이히만의 모습 속에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만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보통이라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그녀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악행의 도구가 되는 것은 왜일까요? 다시말해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주부터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편애했고 이것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는데 바로 형들이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타고난 싸이코패스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동생을 죽이려고 할까요? 그들을 살인공모범으로 만든 문제들은 오늘 평범한 우리들도 얼마든지 악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듭니까?

 

죄의 자리

첫째는 죄의 자리입니다. 12-17절을 요약해서 보십시오.

(창 37: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창 37:14) 이스라엘(야곱)이… 그(요셉)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창 37:17)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지도를 보십시오. 헤브론에서 세겜을 거쳐 도단까지 가는 길은 대략 7-80km 정도 거리인데 산지인데다가 느릿느릿 이동하는 양떼를 몰고는 약 1주일을 가야하는 거리입니다. 집에서 무척 먼 곳입니다. 본문은 다섯 절을 할애해서 형들과 야곱의 동선을 소개하여 살해시도가 이처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악은 그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형들은 집 헤브론이나 그 근처에서는 이런 시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집에서나 주변 이웃들이 모두 그들을 알아보고 그들이 아버지를 속이기에는 아버지가 주변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헤브론 근처에서는 동생을 죽이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그 형제들을 알아보는 이들이 없고 아버지를 속일 때 진실이 드러나기 어려운 곳에 도달하자 평소 품고 있던 그릇된 욕망을 실제로 행하라는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평소 우리를 보호하던 울타리를 벗어나면 강렬해집니다. 배우자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부정한 유혹에 시달립니다. 가급적 가족들은 함께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직장에서 제대로 된 규율이 없으면 부정을 저지르게 됩니다. 국가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범죄자가 늘어납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늘 귀기울이지 않으면 우리의 영은 부패합니다. 교회의 울타리는 성도 개개인을 위해서나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나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평소 우리를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울타리들은 사실은 구속이 아니라 보호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지켜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우자의 잔소리가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직장의 규율은 우리를 게으름과 부정으로부터 보호합니다. 교통법규는 우리의 운전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런 울타리를 벗어나면 부패한 우리의 마음은 유혹을 받습니다. 거기가 죄의 자리입니다. 시 1편은 시편 전체의 주제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지요.

(시 1: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도단은 죄의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의 도단은 어디입니까? 도단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의 집에 머무십시오.

 

죄의 욕망

평범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두 번째 요소는 죄의 욕망입니다. 죄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악을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모든 독일인이 국가주의에 끌려갈때도 이에 저항하는 독인인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독일교회가 히틀러를 찬양할 때도 고백교회는 박해를 당하며 히틀러에게 불의한 전쟁을 그만 두라고 외쳤습니다. 똑같은 죄의 자리에서 왜 어떤 이들은 악에게 넘어가는반면 어떤 이들은 악에 저항합니까? 바로 죄의 욕망의 유무 때문입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창 37: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창 37: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 37: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것이니라.’ 하는지라.

그들은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속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20절이 분명히 설명합니다. 그것은 본문이 두 번이나 반복한 꿈 바로 그 요셉의 꿈을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은 그들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꿈은 단지 요셉이 그들보다 더 높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꿈을 시기했습니다. 시기는 미움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꿈이 요셉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증조부 아브라함과 조부 이삭과 아버지 야곱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에 아무 관심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동생에게 그 꿈을 왜 주셨는지, 그 꿈을 통해 무엇을 하실지 묵상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경솔함은 시기와 미움과 결합하여 하나님의 꿈을 꺾으려는 악한 시도로 이어집니다.

평범한 이들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이 이런 죄의 욕망입니다. 죄의 욕망을 버리지 않고 품고 살면 요셉의 형들처럼 혹은 아이히만처럼 자신도 모르게 악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동생을 향해 증오를 품고 있는 가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식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얼마나 많은 죄의 욕망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지요? 성공한 이웃을 향한 시기, 기대를 저버린 배우자와 자녀들을 향한 분노, 직장동료와 상사, 고객들을 향해 소리없이 쌓이는 냉소, 꼴통보수들을 향한 경멸, 종북을 향한 증오, 동성애자들을 향한 혐오, 카더라 통신을 듣고 품는 형제와 자매를 향한 편견… 여기에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와 경솔함이 결합하면 비극을 낳는 죄의 욕망이 됩니다.

여러분 안에는 어떤 죄의 욕망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악의 도구로 만드려는, 독버섯처럼 자라는 욕망을 뽑아버리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길 빕니다.

 

의의 도구

죄의 자리와 죄의 욕망이 결합하면 평범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고 심지어 살인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악의 역사를 가로막고 의를 이루려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지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이 악행이 벌어지는 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들의 선한 의지를 사용하십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창 37: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창 37: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르우벤은 장자였지만 자신이 여러 동생들의 분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동생을 살리기 위해 꾀를 냅니다. 그 덕분에 요셉은 죽음을 면합니다. 이어서 유다가 나섭니다.

(창 37: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창 37: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유다가 르우벤만큼의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역시 동생의 목숨을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로 그를 살리는데 일조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상황을 사용하십니다.

(창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이집트로 가는 무역상들 즉 비지니스맨들이 ‘때마침’ 우연히도 그 곳을 지나가다가 요셉을 삽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들과 상황을 사용하여 요셉을 살리실 뿐 아니라 이집트로 데려다 놓으십니다.

 

최후의 승리자

자, 이 단락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결국 요셉을 죽이려는 형제들의 의도는 실패합니다. 실패할 뿐 아니라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시려는 하나님에게 역으로 사용됩니다. 즉 하나님은 요셉을 죽이려는 형제들, 요셉을 살리려는 르우벤과 유다, 그저 싼 값에 젊은 노예를 사려했던 무역상들을 모두 사용하셔서 그를 이집트로 보내시려는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악인도 선인도 상황도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승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꿈을 꺾으려는 모든 악한 시도는 실패합니다. 무죄한 의인의 피를 흘리려는 시도, 죄를 숨기고 심판을 잊으려는 시도, 부질없는 욕망을 이루려는 시도, 그리스도의 몸을 흔들려는 시도, 의로운 이들을 모함하는 시도는 모두 실패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모든 선한 의도는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고 약자를 돕고 교회를 세우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설 자리는 어디입니까? 어리석게도 죄의 자리, 죄의 욕망을 품고 결국 실패하고야 말 어리석은 일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구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자들의 기도입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의 진실한 기도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