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스, 기업 무를 자

(룻기 2 : 1-13)

 

맥추절과 룻기

지난 주를 한국 교회에서는 맥추 감사 주일로 지켰습니다. 한해의 반을 보내고 그동안 베풀어주셨던 은혜에 감사하면서 보리 추수에 맞춰서 지키는 감사절이 맥추 감사절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맥추절이라는 절기가 있었습니다. 유월절, 장막절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맥추절은 밀추수가 끝나고 보리 추수가 시작될때 지켰던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유월절이 지난 7주 후에 있기 때문에 7곱하기 7 칠칠절이라고 불리거나  5 곱하기 10 오순절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충 계산을 해보면 이 때쯤이 유월절 사건을 통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있어서 이 날은 우리나라로 치면 헌법이 제정된 제헌절이자 나라가 시작된 개천절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 이 칠칠절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읽었고 또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룻기를 읽었습니다. 바로 룻기의 배경이 되는 계절이 보리추수를 시작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혀지는 또,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중에 하나입니다.

회복의 말씀, 룻기

유대인들에게 룻기의 말씀이 인기있었던 것은 이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룻기는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인생 역전의 이야기이자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성공을 찾아 갔던 모압 땅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서 바닥의 바닥까지 떨여졌던 나오미와 그리고 그의 며느리 룻이 어떻게 놀라운 인생의 역전과 회복을 경험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흉년이 풍년으로 바뀌는 이야기이며 죽음이 탄생으로 변하는 이야기입니다. 대를 이을 사람조차 없던 집안이 다윗 왕의 집안으로 세워지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절망 중에 희망을 발견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도님들의 한명 한명의 삶 가운데 겪고 있는 흉년과도 같은 어려움들이 풍년으로 바뀌는 역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재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건강과 자녀의 문제, 신분의 문제 등 모든 문제들로 인하여 우리의 삶에 찾아온 흉년을 풍년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시게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겪고 있는 영적인 목마름, 소진되고 지친 마음이 다시금 풍성히 채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마음이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고, 식어버린 열정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룻기에 나오는 회복과 역전은 복된 만남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라는 며느리를 만났기 때문에 또 룻은 나오미라는 시어머니를 만났기 때문에 그들의 삶 속에서는 놀라운 회복과 역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회복과 역전은 그들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한 사람을 만났기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를 표현할 수 있는 두가지 키워드는 복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축복의 사람 보아스

보아스는 먼저 복의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다른 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었고 또한 복이 되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보아스는 다른 이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베들레헴 시내에 거주하는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 나와 자신의 일꾼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주인이 자신의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만나서 가장 먼저 할 만한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자, 별일 없지? 자, 일 잘하고 있지? 오늘 수확은 많이 했나? 보통은 이런 말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늘 보아스가 하는 말은 이런 말과는 달랐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보아스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자신의 종, 자신의 일꾼에게도 이렇게 먼저 복을 빌어주는 인사를 하며 나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복을 빌어주며 나아가자 그의 종들 역시 그에게 복을 빌어주는 말로 대답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축복의 사람은 주변의 사람도 역시 축복의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의 축복은 자신의 종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 여인이었던 룻에게 까지 계속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는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12절)

보아스는 모압에서 온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방 여인은 가까이 해서는 안될 존재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섞여 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그들을 정하지 않은 이들로 생각했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그 여인에게 조차 이렇게 복을 비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렇게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복을 끼치는 사람, 복이 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보아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었을 때 그 복은 사실 보아스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종들, 그의 일꾼들을 그를 통하여서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타지인이었던 룻조차도, 그리고 늙은 과부였던 그의 시어머니 조차도 보아스를 통하여 끼니를 이어갈 수 있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복을 끼치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가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고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여호와)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2:20)

본문을 읽고 여기서 나오는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치 않는 그가 앞에서 나온 보아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문을 읽어보면 여기서 나오는 그는 앞에서 나온 보아스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이 고백을 통해서 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고 자신의 이름은 더 이상 나오미 기쁨이 아니라 마라 고통이라고 이야기했던 그가 이제 하나님이 아직도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은혜는 바로 보아스였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보아스라는 인물 자체가 그들, 나오미와 룻에게 은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증거가가 된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 두 여인에게 복이 되어주었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와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사랑의 사람 보아스

보아스는 또한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은 배려와 희생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룻을 향한 보아스의 배려는 오늘 본문 8절과 9절에서 보여집니다.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룻에게 자신의 밭에서 계속해서 이삭을 주어도 된다고 허락하고 룻의 안전을 보장해줄 뿐 아니라 편의까지 제공해 주는 모습입니다.그런데 보아스의 룻을 향한 배려의 모습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오늘 본문을 지나서 2장 16절에서 보아스가 자신의 종들에게 지시하는 말입니다.

“룻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2:16)

보아스는 충분히 부자였기에 룻에게 그냥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곡식단 하나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보리 추수한 한 에바정도 룻에게 주는 것이 보아스에게 큰 어려움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굳이 자신의 소년들에게 곡식 다발에서 일부러 조금씩 뽑아 버려서 룻이 그것을 줍게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룻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룻이 스스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격려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일방적으로 친절을 베풀지 않고 룻을 존중하면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배려라는 것은 이처럼 상대방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친절을 베풀 때 이런 배려하는 마음이 없이 친절을 베풀기 때문에 때로는 그 친절을 통해서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에게 굳이 어렵고 복잡한 방법을 사용하면서 까지 룻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의 이러한 배려는 룻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친절을 베풀 때 보아스는 결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아스는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친절을 베푼 사실을 룻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룻에게 더 좋은 인상을 남기거나, 룻의 마음에 고마운 마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친절을 베푼 사실을 그에게 알릴 수 있는 좋은 방법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보아스는 그것을 절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룻이 좀 더 많은 곡식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기쁨을 누리는 것에 만족했던 것입니다. 그는 룻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이익,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이익을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룻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는 보아스의 마음이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 보아스

보아스는 후에 룻기에서 나오미 집안의 기업 무를자로 소개됩니다. 기업무를자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특별한 관습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대신해서 모든 빚을 갚아주고 그들의 땅을 되갚아 줄 가까운 친족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편이 어려워져서 자신의 땅을 팔게 되었을 때 일정한 돈을 내면 언제든 그 땅을 되찾을 수 있는 권리, 무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에게 그 땅을 되찾을 만한 능력이 없다고 한다면, 형제나 친족이 대신해서 그 땅을 위한 돈을 내고 그들의 땅을 되찾아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감당할 책임이 있는 사람을 가리켜 기업 무를 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보아스가 바로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이었기 때문에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은 돈으로 그 땅을 다시 사서 나오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룻과의 관계에서 아이를 낳아서 그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줘야 한다 것입니다. 보아스보다 엘리멜렉과 더 가까웠던 기업무를 자는 처음에는 자신이 나오미의 땅을 되사서 돌려줬을 때 나오미는 이미 늙었기 때문에 자식 없이 죽을 것이고 그러한 경우에 그 땅은 자신과 자신의 집안의 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그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곧 나오미에게 룻이라는 며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만약 자신이 룻을 통하여 아이를 낳게 되면 그 땅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겠다고 물러납니다. 하지만 기꺼이 그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다합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나오미와 룻을 위해서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보아스의 기업에도 손해를 끼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보아스라고 해서 도깨비 방망이가 있는게  아니고 보아스라고 해서 땅을 파면 돈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아스라고 해서 자신의 돈을 안쓰고 이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아스는 자기의 돈을 써야 했고 그 밭은 자신이 아니라 엘리멜렉의 가문으로 대대로 전해져 내려갈 것이었습니다. 룻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더라도 그 아들이 자신의 가문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갈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도 이 기업 무르는 일을 통해서 감수해야 할 손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이 일을 위해서 매우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자신이 기업무를자가 되어서 엘리멜렉의 땅을 되돌려 주고 엘리멜렉의 이름이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나오미와 룻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나서서 자신의 손해를, 자신의 희생을 감수한 것입니다. 보아스의 사랑은 보아스의 이러한 희생을 통해서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룻을 사랑했던 보아스는 자기의 유익보다는 룻의 유익을 먼저 구했습니다.

이와 같이 보아스는 복의 사람이었고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룻기에 등장하면서 룻기의 분위기는 갑작스럽게 바뀌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죽음, 가난, 징벌, 심판, 절망 등이 룻기의 이미지였다고 한다면 보아스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축복, 은혜, 희망, 생명 등이 룻기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됩니다. 보아스라는 한 사람의 등장은 룻기서의 분위기마저도 변화시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보아스가 같은 사람을 만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의 기업무를 자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보아스와 같은 분을 만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빌어주시고 우리의 복이 되어주는 분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교회에 나오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그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누구십니까? 바로 우리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빌어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복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위해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셨습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을 감내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해서 자신은 죽임당하시는 것을 감내하셨습니다. 우리의 저주 받은 삶, 심판 받는 삶을 축복받는 삶으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저주와 심판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업 무를 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기업무를 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회복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아낌없이 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다른 모든 회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꺼이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회복자가 있습니다. 우리의 회복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아멘으로 대답하시는 모든 분들의 삶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회복이 있으시길 소원합니다.

회복자의 사명과 축복

그런데 우리가 회복시키는 자 보아스를 살펴본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회복자이시라는 사실 만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보아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회복자의 사명을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을 회복시키실 때 보아스를 통해서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회복시키시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실 때 혼자서 일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동역하십니다. 사실 나오미와 룻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사람들을 통해서 특별히 보아스를 통해서 나오미와 룻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해서 놀라운 회복을 경험한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는 일을,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회복시키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회복시키는 일을 맡기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라는 좋은 롤모델을 통해서 우리가 이 회복시키는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고 다른 사람을 사랑함을 통해서 회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보아스와 같은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되 배려심을 가지고 희생을 감내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보아스와 같은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이와 같이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보아스처럼 살다가는 결국 내 인생은 남 좋은 일만 하다가 끝나고 말겠네요. 열심히 퍼주고 나서 나는 남는게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사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다른 사람만을 위해서 살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손해를 보면서 살다간 나의 삶이 결국 불행해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오늘 룻기 말씀의 마지막 부분을 잘 보시면 그것이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룻기 마지막 부분에 나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왕국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 왕의 족보입니다. 바로 룻이 나은 아들을 통해서 다윗 왕의 대가 세워졌음을 이야기하는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에 이름이 남았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4장 21-22절의 말씀입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4:21-22)

다윗의 족보에 이름이 남은 사람은 엘리멜렉이 아니라 보아스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은 기꺼이 손해를 감수했던 보아스의 이름이 결국 이 영광스러운 족보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뜻밖의 축복입니다. 보아스가 한 일은 열심히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이 었습니다. 보아스가 한 일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그 일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큰 복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님 보아스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받는 복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이름을 다윗의 족보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보아스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회복과 구원 사역에 동참한 사람으로서 기록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회복시키는 사역에 부르십니다.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예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그 역할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시간과 나의 재물과 나의 마음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일입니다. 나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우리가 감당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손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뜻밖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 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