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이 정말 싫습니다 (요나 4:1-11)

 

전에 있던 교회에서 유명한 복음송 가수를 초청하여 찬양 집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집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떤 집사님이 참 많이 수고했습니다. 초청 비용도 일부 대고 또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일에도 열심히 했습니다. 수고하고 준비한 만큼 집회는 은혜스럽게 잘 진행되었습니다. 몇 사람들은 앞 자리에서 두 손을 들고 함께 찬양하는 사람들도…..그런데 집회가 마지막 절정으로 갈 무렵 그 집사님이 뒤에 있는 저에게 와서… 목사님 저기 저 손들고 있는 사람 보이시죠? 정말 상대하기도 싫은 사람인데, 우리 학원에 자기 아들 보내고는 12달 학원비를 떼먹고 학원 끊은 사람입니다. 그 상황이 그 집사님께는 얼마나 어이 없고 화나는 상황이었겠습니까?
그 집사님의 말과 표정을 통해 그 마음을 대충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사람이 찬양집회는 왔을까? 내가 저런 사람들 오라고 그 수고를 했나? 저런 사람이 손들고 또 은혜받았다고 하는건 또 뭔가? 더 나아가서 하나님 이게 뭡니까?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은혜받았다고 두손들고 저렇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은혜줄 사람에게 은혜를 줘야죠. 지금껏 그 수고를 한 나는 뭡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저는 이 찬양집회를 준비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요나의 분노]
오늘 요나가 그렇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했을 때, 처음부터 가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는데 앗수르 이들은 너무 흉포한 족속이었고, 이스라엘의 적대국가. 이미 이스라엘에 너무 많은 해악을 미쳤고 또 앞으로도 미칠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나훔 3:1>절은 니느웨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요나 1:2>에서도 하나님은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요나 당시 마침 앗수르는 안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면서 국력이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니느웨, 큰지진, 전염병 더구나 일식이 일어났었다. 당시 사람들은 해가 가리워지는 일식을 대단히 불길한 징조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대로 가만뒀으면 하는, 그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당시 요나는 여로보암 2세 이스라엘의 장래를 예언하고 또 그 예언대로 성취됨으로 북 이스라엘에 대표적인 선지자였습니다.
<왕하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실 때 처음부터 뭔가 개운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가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버린 곳, 무관심한 곳, 심판하시기로 작정한 곳에는 결코 당신의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나 생각에 니느웨는 그대로 가만둬서 고생 좀 하게하고 나중에 망하면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로 자신을 보내실 때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억지로 보내셨거든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지지라” 선포했는데, 이 사람들이 막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선지자로서 자신의 체면은 말할 것도 없고, 니느웨가 은혜받는 것 자체가 너무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1-2절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처음부터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가만둬도 될 이 악한 자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 자체가 개운치 않았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제가 안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분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의 하나님을 향한 분노에 대해서 본문3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하나님 이런식으로 하실거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라고… 사실 죽여주십시오라는 것은 실제 죽겠다는게 아니다. 항의다. 진짜 죽고 싶으면 그냥 모래에 머리 처박고 죽으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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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이유]
그러면 요나가 그토록 분노한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예언대로 일이 성취되지 않아서 선지자로서 체면을 구긴 것도 싫었지만, 가장 원색적인 이유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고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저 사람은 안됩니다. 저 사람은 절대 안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은혜받고 축복받을 때…
왜 제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 맘대로 하십니까 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하며 소리칩니다.
요나는 아마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상황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도의 문제고, 죄인은 심판 받아야 한다는 정의의 문제입니다. 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번복하시고, 정의의 문제, 공의의 문제를 무시하면서까지 이렇게 행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제 분노는 바로 진리의 문제고 정의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하여 과연 그 문제가 진리의 문제이고 정의의 문제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오늘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를 발한 요나는 과연 자기가 선포하고 또 지금 생각하는대로 니느웨에 심판이 임하는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용서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지 지켜봅니다.

그런데 그 성 밖 언덕배기에서 앉아 지켜보고 있는데 너무 더운 거예요. 괴로워하고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이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머리 위로 그늘이 지게 해주셨는데, 너무 시원…. 습기가 없는 건조한 지역에서는 그늘지고 바람만 조금 불어주면 시원하다. 6절에 “…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그런데 곧바로 7절에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하루 너무 좋았는데 다음날 해도 뜨기 전에 그냥 벌레로 갉아먹고 시들게 하신 것. 그러니 다음 날 낮에 너무 힘든 것. 처음부터 없었으면 모를텐데, 어제는 아주 좋았거든요.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면서 막 화를 냅니다.
▶또 죽겠네 죽겠네… 성도는 이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주께 있네….

본문 9-10절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니느웨의 12만명을 없애버리는 일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네가 심지도 기르지도 아니한 그 미물 박넝쿨 하나를 없애는 그 일에 그토록 성내는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물으십니다.

네가 성을 내는 이유는 그 박넝쿨이 네 머리 위를 조금 시원하게 했었다는 너의 그 작은 유익때문이 아니냐! 라고 물으십니다.
너의 그 사소한 유익을 따라, 너의 감정에 따라, 너의 이해관계를 따라 네가 내는 분노와 성이, 정말 진리의 문제냐, 정말 정의의 문제냐 라고 물으시면서 요나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멀리 있는 아프리카를 위해서 기도하고, 온 인류를 위해서도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내게 상처 준 내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안된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정의 문제이고 진리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따라 보는 눈을, 자신의 감정을 따라 보는 눈을,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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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눈으로]
오늘 요나서가 던지는 메시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 라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하나님은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 나의 원수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만큼 쉽지 않고 마음이 상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왜 은혜에 합당치 않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허비하십니까? 하나님은 왜 마음대로 하십니까? 그 사람은 은혜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그 말이 모순인 것!
◆은혜의 두 조건. 전혀 자격이 없는 자가 받아야… 베풀 의무가 없는 자가 베풀어야…
맞습니다. 그들은 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것을 베풀어야할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인 거죠.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공의로우신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넘치는 죄를 향하여 모든 죄인들을 향하여, 멸망으로 심판하시고, 인류역사를 닫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완전한 거룩이고 하나님의 공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죄 앞에서 그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래서 비교할 수 없는 은혜 “절대적인 은혜”,

<사46: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그 은혜는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을 베푼 하나님의 사랑…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를 먼저 구원한 이유… 네가 더 의로워서가 아니고 너를 통해서 그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복..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12:3)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심. 너를 먼저 구원한 이유는, 네가 더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네 옆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를 복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 하는 스스로의 눈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이웃과 모든 상황을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바로 보지 못하면, 미움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도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는지 모릅니다.

▶자녀 사랑 – 그래서 내 자녀와 다투는 다른 집 자녀를 판단하고 그 가족을 정죄…
▶교회 사랑 – 그래서 옆에 다른 교회가 잘되면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민족 사랑 – 그래서 우리를 침략한 민족에 대한 미움을 합리화하고, 못한 민족을업신여김

●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 자녀만큼 이웃의 자녀가 동일하게 소중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동일하게 이웃의 교회도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것을, 천국에서는 결국 모두 한 가족인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도 존중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 볼 때 그것들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축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질문으로 끝납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에게 이 니느웨를 나의 눈으로 볼 수 없겠느냐라고 묻고 계신 것.
또한 우리에게 우리의 유익과 감정과 이해관계를 따라 판단하는 모든 것들을 나의 눈으로 볼 수 없겠느냐라고 질문…. 아멘으로 응답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