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8:5-12/왜 창을 던지는가

171001 주일설교

 왜 창을 던지는가

모짜르트를 소재로 한 영화 중에 가장 널리 알려졌고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1984년 밀로스 포만 감독이 만든 ‘아마데우스’입니다.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에 빛나는 명작입니다. 비엔나의 궁정악장인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젊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천재적 재능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독살하지만 그 자신도 점점 미쳐가서 마침내 자살을 시도했다가 수용소에 갇힙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온 신부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 영화가 작품성뿐 아니라 흥행에도 크게 성공한 것에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에 대한 공감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살인도 마다않는 인간의 형제를 향한 시기와 미움, 그로인해 파괴되어 가는 영혼은 문학의 오래된 소재였고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비극이기도 합니다. 아벨을 살해한 가인으로부터 친구를 왕따시키고 폭행하는 중학생들과 외국인, 유색인종을 혐오하고 공격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은 보편적 경험입니다. 직장,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 가족끼리도 미워하고 신앙인들이 모인 교회에서조차도 험담과 정죄가 일어납니다. 자, 이런 일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요? 이런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사울과 다윗 이야기를 2주 동안 살펴보면서 답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번 주에는 사울을 통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고 다음 주에는 다윗을 통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시기의 창

자, 먼저 사람들은 왜 다른 이들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등장하는 미움과 증오의 드라마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오늘 본문의 주인공 사울과 다윗의 그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 전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도 지극히 겸손한 모습의 젊은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오랜 숙적 블레셋을 제압하고 느슨한 열두 부족 연합체였던 이스라엘을 통합한 왕국을 세워 초대 왕에 오른 사울은 그 업적만으로도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의 노년은 위대한 왕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이기 위해 창을 던지는 포악한 왕으로 등장합니다. 11절입니다.

(삼상 18:11) 그(사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사울이 다윗을 이렇게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시기입니다. 젊은 다윗의 성공은 백성들의 엄청난 찬사를 받았습니다. 6-8절입니다.

(삼상 18: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삼상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삼상 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대중은 항상 새로운 스타를 원합니다. 사울은 잊혀지고 다윗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사울의 성공은 현재 다윗의 그것과 비교하여 더하면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지만 그의 성공은 잊혀졌고 사울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인정하지 못 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의 시절부터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 말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버릇없는 젊은 것들에 의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진정으로 역사의 발전에 기여하는 세대는 지나간 세대의 영광을 잊고 다음 세대에게 역사의 바통을 넘겨 줄 때가 언제인지 아는 세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쇠락의 한 원인 역시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미래를 준비하지 못 하는 것에 있습니다. 세대가 바뀌었고 가치관이 변화해서 당연히 새로운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을 담는 그릇이 바뀌어야 함에도 여전히 과거의 영광과 관습 그리고 미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사울과 같이 되지않으려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 개개인도 시기라는 비늘을 눈에서 벗겨내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어두운 밤을 눈을 감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미움받는 이의 노래

다윗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사울이 맡기는 일마다 지혜롭게 처리하고 목숨을 걸고 블레셋으로부터 조국을 지킨 것 뿐입니다. 그의 악함과 배신과 실패 때문이 아니라 지혜와 성실과 그로인한 성공 때문에 그는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5절입니다.

(삼상 18:5)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우리가 미움을 받는 것은 우리의 잘못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만, 아무 잘못도 없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성공은 실패한 이에게 시기를 불러옵니다. 의로움도 불의한 이에게는 그렇습니다. 정직함도 거짓의 사람들에게는 시기의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못없이 미움을 받을 때에 그로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미움을 받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지만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낙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는 노력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원수의 시기와 미움을 받을 때마다 푸르른 들판에서 양을 치던 경험을 떠올리며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게 위대한 영감을 전해 주는 시편을 묵상하는 복을 누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에도 억울하게 미움받는 이들은 그들만의 시와 노래가 필요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시와 노래가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에게 이런 시와 노래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두려움의 창

사울의 시기는 곧 이어 두려움으로 발전합니다.

(삼상 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 (삼상 18:15)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 (삼상 18:29)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두려움이란 단어가 ‘더욱더욱’이란 부사와 결합하며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그의 두려움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기는 눈을 가리고 앞이 보이지 않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내버려두면 그 두려움은 점점 커져 나중에는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우리 영혼을 삼킵니다. 다윗은 결코 그런 야심을 품지 않았지만 사울은 언제 다윗이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그 의심은 결국 바위처럼 단단한 확신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늘 두렵습니다. 인정받지 못 할까 두렵고 사랑받지 못 할까 두렵고 잘못된 선택을 할까 두렵습니다. 실직할까, 돈을 잃을까, 재산을 잃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을까, 실패한 인생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 모든 두려움은 마치 사냥감을 좇는 사냥개처럼 우리를 쫓아옵니다. 좇기는 이는 평화가 없습니다. 좇기는 이는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두려움에 좇기는 이들이 유사품이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는 가장 흔한 방법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탓하고 비난하고 험담하며 조롱하고 공격할 때 우리는 우리 대신 비난받고 실패하고 짓밟히는 누군가를 보며 거짓된 안정감을 누립니다.

아, 이 절망적인 죄인들을 구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짓밟히시는 방법을 택하신 이유가 어쩌면 이것이 아닐까요?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우리를 대신해 짓밟힐 형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대신해 짓밟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임을 깨달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미쳐가는 마음

시기의 비늘로 눈이 어두워지고 두려움의 사냥개에게 좇기다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를 대신해 희생당할 제물을 찾게 됩니다. 9절입니다.

(삼상 18: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울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백성의 지도자인 그는 마땅히 먼저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그가 돌볼 백성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백성을 돌아보지도 않고 누구만 주목합니까? 다윗만 봅니다. 왜요? 그를 죽여야 시기도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다윗은 그의 실패를 대신할 희생제물입니다. 이제 사울의 삶의 이유가 다윗을 미워하하고 죽이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 자신의 삶을 살지 못 하고 남을 죽이기 위해 살아가는지요! 수많은 이들이 진정 자신의 삶을 살지 못 하고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일터에서 누군가가 계속 마음에 쓰여 일에 집중하기 어렵고 교회에서는 제대로 예배하기 어렵고 집에서는 평안이 없다면 여러분은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듯 그 누군가를 계속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살지 못 하고 남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 하고, 가족과 평화를 누리지 못 하고, 일에 행복하고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 하게 하는 삶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그런 상태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인간의 영혼은 파괴됩니다. 10절입니다.

(삼상 18: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쓰레기장에 파리가 꼬이듯 시기와 두려움으로 썩어가는 마음에는 악령이 깃듭니다. 미움의 악취가 강할수록 더 강력하게 깃듭니다. 사울은 정신 없이 떠들어댑니다. 미쳐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미친 마음은 형제를 향해 살인의 창을 날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창을 날려댑니다. 바로 이것이 창을 날리는 이유입니다. 이런 마음에 대해 예수님이 통찰력있게 선언하셨습니다.

(요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병든 마음을 치유하시는 분

여러분, 이제 사람들이 왜 창을 형제, 자매에게 던지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것은 그 마음이 고칠수 없을 정도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떨어진 유리병처럼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미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자입니다. 몸이 아프든지 마음이 아프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 누워있지 않는다면 마음이 아파 누워있습니다. 병원의 병자가 고통에 신음소리를 참을 수 없듯이 마음의 병자들은 병들고 부서지고 미친 마음으로 형제, 자매를 향해 소리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기의 창, 미움의 창, 정죄의 창, 비난의 창을 날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구약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늘 다스리라고 권하십니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잠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런데 이미 병들고 부서지고 미친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지키고 다스립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할렐루야! 사울처럼 병들고 부서지고 미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우리는 쉼을 얻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보조를 맞추어 걷는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 분이 가신 길을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치유되고 회복되고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어렵지 않나요? 미친 마음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쉬운 멍에입니다. 병든 마음으로 죽음의 짐을 지고사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우리는 치유를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을 늘 지켜주시고 또 구원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