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4:1-7/왜 창을 피하는가

171008 주일설교

아미시 그레이스

먼저 오늘 주제와는 상관이 없지만 아픈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1일 라스베가스 총기참사의 59명의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527명의 부상자들이 하루 속히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매년 미국에서만 평균 3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으로 목숨을 잃는데 하루 100명 꼴입니다. 이런 참사가 끊이지 않음에도 오로지 돈 때문에 온갖 거짓 명분으로 총기규제를 반대하는 전미총기협회와 그들의 로비를 받는 정치인들은 미안하지만 미국을 서서히 침몰시키는 거대한 악의 일부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꼭 11년 전인 2006년 10월 2일에도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총기사고가 있었습니다. 펜실베니아주 니켈마인즈라는 아미시공동체 내의 학교에 찰리스 칼 로버츠라는 32세의 남자가 총기를 들고 난입하였습니다. 그는 12살 때 친척 여동생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20년 전의 복수를 한다며 10명의 소녀들을 나란히 세운 뒤 총으로 쏘고 자살하였습니다. 3명의 소녀가 현장에서, 2명의 소녀는 후송 중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참사가 다른 사건과 달리 미국인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아미시 공동체가 보여준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공동체는 사건 발생 몇 시간 뒤 기자회견을 통해 범인을 용서한다고 발표하고 그의 집을 찾아가 그 가족들을 위로하고 그의 장례식에도 찾아가 돈을 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잊고 지내던 단어, 용서를 아미시 공동체는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믿음과 삶에 대한 관심으로 아미시 그레이스라는 책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자녀들의 살해범을 용서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분노와 적개심을 불태우는 대신 용서와 긍휼을 택하게 한 것일까요? 이 질문들은 오늘도 억울하게 비방과 모욕의 창을 맞고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리라 생각됩니다.

 

왜 창을 피하는가

지난 주에 우리는 사울이 왜 다윗에게 왜 창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 답은 사울의 마음이 시기와 두려움으로 병들고 상하고 미쳐가서 마침내 창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창을 맞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의 미쳐가는 마음은 누구든지 희생양을 찾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다윗이 왜 사울의 창을 피하기만 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삼상 18장과 19장에 의하면 사울은 적어도 세 번 창을 다윗에게 던집니다. 그 때마다 다윗은 피하기만 할 뿐 창을 뽑아 다시 사울에게 던지지 않았고 결국 엔게디 광야로 도망칩니다. 오늘 본문은 엔게디 광야까지 다윗을 죽이러 좇아나선 사울과 다윗 사이에 벌어진 일을 다룹니다.

우리에게 다윗의 능력과 영향력, 따르는 군대가 있다면 누가 그 창을 피하기만 하고 다시 뽑아 던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은커녕 첫 번째 창이 날아올 때 바로 그 창을 뽑아 던져 복수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왜 창을 뽑아 사울에게 되던지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답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얻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특별히 선발한 3천 명의 특공대를 끌고 엔게디 광야로 들어갑니다. 광야를 수색하던 중 사울은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어두운 굴속으로 들어갔는데 우연히도 그 곳은 다윗과 그 부하들은 숨죽이고 숨어있던 곳이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위해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데 다윗은 그들을 이렇게 말립니다. 본문 6절입니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삼상 24: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 하게 하니라.

26장에서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집니다. 그 때도 다윗은 이렇게 말하며 부하들을 말립니다. 26:11입니다.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함

사울은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운 왕입니다. 그 왕을 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전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함, 이것이 다윗이 사울에게 창을 다시 던지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지 않았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것은 악행입니다. 그리고 이 악행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다윗에게는 그 권리가 없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악행을 했다고 다윗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할 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사울의 다윗에 대한 악행과 다윗이 사울에게 복수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피해를 입으면 복수할 권리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억울한 고통을 겪었으니 거기에 책임이 있는 이에게 고통을 되돌려 줄 권리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도 아닐 뿐더러 세상의 법정신에서도 부정되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자기 권리를 지키거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법률이 정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는 행위를 금하는’ 원칙입니다. 그럼 어떻게 억울함을 풉니까? 법이 정한 바를 따르라는 것이지요. 성경이 가르치는 바도 마찬가지입니다.

(히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을 신뢰함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악행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수심에 사로잡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재차 사울을 죽이려하는 부하들을 말리며 이렇게 강조합니다.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공의를 행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 때문에 다윗은 또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9절입니다.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그가 내게 악을 행했더라도 내가 복수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악행이 되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나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너무나 확실히 믿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번 날아오는 창을 피할 뿐 복수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아미시 공동체 사람들에게 기자들이 몰려들어 물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당신들의 자녀를 해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오히려 당황하며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고 되물었다는 것입니다. 풀이하자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용서는 애초부터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미움과 저주를 쏟아내는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않고 공의로우심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면 복수심을 버리고 원수마저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마귀의 계략을 무너뜨리고 위대한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는 것은 얼굴이 화끈거리듯이 부끄럽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려주었을 때 비록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사울은 회개합니다.

(삼상 24: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삼상 24: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삼상 26:21)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물론 사울은 이 회개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한 것이 소용이 없는 것 아닙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용서의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원수가 회개하여 용서받게 될지 말지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의 회개를 만들어내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믿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용서하는 것 뿐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감

하나님을 믿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의 가장 큰 열매는 원수의 회개가 아니라 나의 변화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벧전 2:23입니다.

(벧전 2:23) 그분은 모욕을 당할 때도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할 때도 위협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또 두려워하는 것은 복수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우리를 지켜주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만듭니다. 다윗의 얼굴에서, 아미시 성도들의 얼굴에서 세상은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능력은 병들고 파괴되는 세상을 지금도 치유하고 회복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사울의 창을 피하는 대신 그에게 되돌려 던졌다면 그래서 사울을 죽이고 왕좌에 올랐다면 그는 제 2의 사울이 되었을 것이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왕은 사라지고 위대한 시편도 부르지 못 했을 것입니다. 아미시 공동체 사람들이 살인자를 비난하며 증오하며 살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닌 마귀의 제자가 되어 세상의 파괴에 동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창을 던지는 원수를 미워하며 비방과 저주의 창을 우리도 던진다면 세상은우리의 얼굴에서 그리스도가 아닌 마귀의 얼굴을 발견할 것입니다. 혹 여러분에게 지금도 창이 날아오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 여러분은 그 창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