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8:6-26/누가 더 죄인인가

171015 주일설교

 

마약에 중독된 아기들

오늘 설교의 서두는 좀 혐오스러울 수 있습니다. 먼저 한국뉴스에 소개된 미국소식을 영상으로 잠깐 보시겠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채 태어나는 아기들)

https://www.youtube.com/watch?v=ur5R5q3TwXU

미국에서 마약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참으로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상에서 보신 것처럼 미국에서는 한 시간에 3명씩 마약중독 아기가 태어납니다. 건강하게 태어나도 만만치않은 인생을 마약에 중독된 채 시작한다면, 요행히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이 아기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당연히 임신상태에서도 마약을 복용한 그 엄마들이 비난을 받아야겠지요. 그러나 그녀들을 비난하는 것만으로 이 악의 실체를 우리는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요?

이 이미지를 한 번 보십시오. 1999년 경 미국의 약물중독사망자는 8천 명 정도였습니다. 약물중독사망은 일부 도시들에 국한된 문제였습니다. 그 수는 2004년 30,000명, 2006년 38,000명, 2013년 46,000명, 2015년 52,000명 그리고 작년에는 무려 64,000명으로 늘어나고 미국 전역으로 그 문제가 확대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마약성 진통제

1990년대 후반 Purdue Pharma라는 제약회사가 의원들에게 로비를 해서 옥시코돈이라는 약의 사용범위를 확대합니다. 옥시코돈은 흔위 마약성 진통제라고 불리는 것으로 오피오이드를 주성분으로 하는 헤로인과 거의 유사합니다. 진통효과는 좋지만 중독의 위험성 때문에 말기암환자, 대형수술환자 그리고 사고로 실려온 응급환자 등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약이 법개정으로 두통, 치통 그리고 디스크 등과 같은 일반환자들에게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이 회사는 중독의 위험이 없다고 대대적으로 TV광고를 하고, 이들의 로비를 받는 일부 의사들은 꼭 필요가 없는 환자들에게도 이 약을 마구 처방하기 시작했습니다. NBC의 보도에 의하면 맨하탄의 한 의사는 5년 동안 220만 개가 넘는 옥시코돈을 처방했습니다. 2011년 미국 의사들이 옥시코돈과 유사한 아이드로코돈을 1억 3천 만 건 이상을 처방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두통, 치통 때문에 진통제를 처방받으러 갔던, 평생 마약을 접해본 적도 없는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들이 마약성 진통제 중독자가 되고 무더기로 죽어나가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이 회사들은 불티나게 팔리는 약값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계속되는 마약단속국 등의 경고와 중독사망자의 급격한 증가에 당황한 정부와 식품의약국(FDA)이 2010년 이후 뒤늦게 마약성 진통제 사용을 규제하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10여 년 이상의 남용으로 이 진통제에 중독된 수많은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약을 사기 어렵게 되자 아예 헤로인을 불법적으로 구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헤로인도 계속 쓰다보면 내성이 생겨서 마약 효과를 보지 못 하게 되기에 사람들은 헤로인보다 더 싸고 중독성은 40배 강한 펜티넬이라는 마약을 쓰게 됩니다. 인터넷에서 5불이면 살 수 있다는 이 펜티넬은 재배된 양귀비에서 추출하는 헤로인과 달리 100% 실험실에서 화약약품으로 만드는데 그 결과는 더 치명적입니다. 더 쉽고 더 빨리 중독되고 더 빨리 죽습니다.

최근 뉴욕주 롱아일랜드 카운티를 비롯한 9개 카운티가 공동으로 19개 대형제약회사를 상대로 마약성 진통제 남용에 대한 책임을 물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물론 이 회사들은 막강한 로펌 변호사들을 고용하여 책임을 면할테고 혹시 소송에 지더라도 그들이 벌어들인 돈의 극히 일부만을 치료비용으로 내놓고 말겠지요.

자, 이제 다시 묻습니다. 마약중독아기들은 누구의 죄입니까? 그들의 엄마입니까? 그녀들보다 더 큰 죄를 가진 이들은 없습니까?

 

죄에 대한 편견

창세기를 신중하게 읽어내려가던 사람이라면 38장에 이르러 좀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으로 거대한 강처럼 흘러내려가던 족장들의 이야기가 잠깐 유다의 이야기로 곁길로 빠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메시야의 족보가 다말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메시야의 계보를 소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분명히 알겠는데,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38장 전체를 이렇게 자세히 소개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38장의 두 명의 주인공은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입니다. 유다는 장남 엘을 다말과 결혼시키는데 엘은 무슨 죄인지는 모르나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고대 근동의 유목민 사회에는 형사취수제라는 결혼제도가 있었습니다. 형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잠자리를 하여 아들을 낳게 해주는 제도입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인들은 자손을 통해 자신의 생명이 계속 유지된다고 믿었기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가 끊어지는 것을 큰 불행으로 보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또한 부모의 유산은 아들을 통해서만 상속되기에 아들이 없는 여인은 아무런 생계대책도, 노후대책도 없이 빈민으로 추락합니다. 그래서 유다는 둘째 오난으로 하여금 형수와 잠자리를 하도록 했는데 그 역시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를 회피하다가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유다는 셋째 셀라까지 잃을까봐 거짓말을 하여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버립니다. 한참 후에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안 다말은 거리의 여자처럼 꾸미고 이스라엘 남부 딤나라는 도시를 방문한 시아버지 유다를 속이고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녀가 임신한 것이 소문이 나자 유다는 자신의 아이인 것을 모른 채 당시의 법대로 다말을 사형시키려 합니다. 다말은 유다가 자신에게 맡긴 족장의 신분을 상징하는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밀어 진실을 밝히고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녀를 돌려보냅니다.

두 사람 모두 죄인입니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속이고 그와 잠자리를 하였습니다. 유다는 다말을 속이고 그녀의 권리, 아들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죄가 더 큽니까? 유다가 한 말이 그 답을 알려줍니다.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다말)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유다의 죄가 더 큽니다. 왜입니까? 다말은 권리를 빼앗긴 희생자였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 권리를 되찾고자 유다를 속였습니다. 죄는 죄이지만 정상참작이 되는 죄, 예를 들자면 정당방위가 선을 넘은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아들들의 잘못을 며느리에게 떠넘긴 죄, 당시 사회의 가장 약자였던 과부의 생존권을 빼앗은 죄 그리고 부족장으로서의 권력을 사용하여 저지른 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죄는 유다의 것이 더 큰데 비난받고 죽을 뻔 한 사람은 다말뿐입니다. 유다는?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 합니다. 그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보여주듯 그는 유목민 사회의 절대권력자인 부족장이기 때문입니다.

 

은밀하고 거대한 죄

강자의 큰 죄는 묻히고 약자의 작은 죄만 고발되는 불평등은 어느 사회에나 있습니다. 마약을 복용한 엄마는 감옥에 갇히지만 그들에게 마약을 판 제약회사 부자들은 궁궐같은 저택에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성공하는 경영의 비밀 운운하는 강의를 하고 다닙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장발장이 된 수많은 아버지들은 감옥에 갇히고 그 가족들은 비참한 생활을 못 벗어나지만 천문학적인 국민세금을 강바닥에 뿌리고 서민들이 평생 벌어도 만져보지도 못 할 돈을 빼돌린 사람들은 봉건시대 왕들도 누려보지 못 한 호사를 누리며 대대손손 그 부귀를 이어갑니다. 유리창을 깨고 1,000불을 훔치면 감옥에 가지만 넥타이를 매고 이름도 생소한 금융상품을 만들어 판며 1,000만 불을 훔치면 국민세금까지 지원받으며 포춘지에 실리는 스타가 됩니다. 우리는 약자의 작은 죄는 보면서 강자의 큰 죄는 못 봅니다. 어쩌면 못 본 척 합니다.

보수적인 미국교회와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 아래 성장한 한국교회에는 이런 왜곡된 인식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죄를 강조하고 비난하는 것에는 열심이지만 구조적인 죄는 외면하고 못 본 척 합니다. 심지어 구조적인 죄를 옹호하고 그 일부로 편입되려 애쓰기도 합니다.

지난 세기 한국교회는 술, 담배, 제사는 지옥 갈 죄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국민을 학살하고 세금을 빼돌리고 뇌물을 받으며 불의를 저지르는 권력자에게 찾아가서는 하나님이 세운 대통령이라고 축복기도를 하고 왔습니다. 물론 그 대가로 여러 가지 혜택을 누려왔습니다. 왜 불의에 침묵하느냐고 물으면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우며 세상 정치, 사회 문제에 교회는 중립을 지켜야 하다고 답했지만 사실상 그들의 불의를 묵인, 방조한 것입니다. 강도가 행인을 때려죽이고 있는데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중립이 될 수 있습니까? 소리치고 강도를 말려야 하는 것이지요.

히틀러에게 대항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본 훼퍼 목사에게 왜 목사가 세상 일에 개입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미친 사람이 차를 몰고 사람을 치어 죽이며 다니는데 침묵하거나 기도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당연히 차에서 그를 끌어내려 사람들을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 훼퍼와 같은 소수의 고백교회성도를 제외한 다수의 독일교회는 히틀러를 적극 지지, 찬양하였습니다. 히틀러는 교회를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고 여러 가지 혜택을 줄 것을 약속했고 독일교회는 그런 히틀러를 위해 기독교 절기를 독일민족주의의 절기로 변질시켜 주면서까지 그를 지지했습니다.

최근 한국보수교회들이 세습을 정당화하고 종교인 세금납부를 반대하며 내세우는 논리를 보면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권력과 기득권의 불의를 묵인하고 옹호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이미 기득권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의미를 잃은 젊은이들

미국교회는 어떠할까요? 최근 여러 조사기관들은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미국인들은 20%가 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표적 종교 조사 연구기관인 PRRI (Public Religion Research Institute)가 실시한 ‘미국인 종교성향에 관한 조사 결과’(America’s Changing Religious Identity)는 기독교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고 그 감소세는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뚜렷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중심적 복음’의 저자 테리 히튼은 이런 현상은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지난 40년간 복음주의 기독교는 TV 등 미디어를 이용한 전도를 통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적이고 보수적인 방향으로 신앙을 전파해왔고 그 결과로 교회가 실질적이고 공적인 영역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의식있는 대중과 젊은이들은 교회의 메시지를 통해 교회 밖의 삶의 문제에 아무런 가이드도 찾을 수 없게 되어 점점 교회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한인교회를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한국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은 좀 과장하면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이민 1세대도 교회말고는 커뮤니티가 없이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2세대를 보십시오. 신앙이 깊다는 젊은이들도 주일 외에는 1세대처럼 교회 중심으로만 살거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삶의 대부분을 교회 밖에서 보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들이 마주하는 사회, 정치, 경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듣지 못 하고 죽어서 천국 가는 메시지만 전하는 교회는 죽기 전에만 가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는 그 탈출구를 번영복음에서 찾았습니다. 잘 믿으면 현실에서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금방 그 거짓말이 탄로났고 쇠퇴를 막은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돌아서는 용기

미국교회도 한국교회도 우리가 가졌던 편견을 인정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다는 다말이 내미는 증거들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다시 26절을 보십시오.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다말)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쉽지않은 용기입니다. 권위적인 아버지가 자녀들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사장이 직원들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정부가 시민들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지않으면 아버지는 사랑을 잃고 사장은 존경은 잃고 정부는 신뢰를 잃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자의 죄, 구조적인 죄를 외면하고 심지어 그 속에 편입되기까지 한 죄, 복음을 개인 구원의 영역에 가두어 버리고 소원성취의 도구로 변질시켜 버린 죄, 복음의 엄중한 부르심은 외면하고 자기중심적 신앙만 추구한 죄… 이런 죄들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유다와 같이 용기를 내지 못 한다면 교회는 더 큰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한국교회에 이런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