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2:14-38/멀고 험한 화해의 길

180624 주일설교 요셉10
화해가 어려운 이유
최근 남북정상회담이 두 차례 있었고 북미정상회담까지 지난 6월 12일에 있었습니다. 적대관계에 있던 정상들이 손을 맞잡은 장면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감격하였지만 합의문을 보고 구체적 내용이 빠져있다는 비판도 만만찮았습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비핵화 등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의식한 듯 싱가폴 회담은 북미가 앞으로 가질 여러 회담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멀다는 것입니다. 참된 화해와 평화의 길은 오래 걸립니다. 왜일까요? 
오늘 우리는 창 42장 중후반부를 읽었습니다. 2주 전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는 장면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후 요셉이 그 형들에게 한 수수께기 같은 행동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절하는 것을 보며 자신이 열일곱 살에 꾸었던 꿈이 성취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 뒤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 사실을 45장으로 미리 가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 45: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자신이 겪은 모든 고난이 야곱 일가족 전체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깨닫고 형들에게 근심하지 말도록 당부하고 아버지까지 데려와서 모두가 이 이집트에서 함께 살며 이 혹독한 기근을 이겨내자고 합니다. 기적같은 화해와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요셉은 42장에서 형들이 처음 와서 절할 때 그 즉시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화해를 시도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왜 45장에 이르기까지 대략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한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는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3일 동안 감옥에 가둡니다. 그 후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시므온을 잡아 두고 나머지 형들에게 곡식을 주어 돌려보냅니다. 그 후 베냐민을 데려온 형들을 융숭히 대접하는 듯 하더니 다시 베냐민만을 가두고 나머지 형들은 돌아가라고 합니다. 요셉은 왜 그랬던 것일까요? 참된 화해를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빙산을 녹이는 은혜
첫째는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에 응어리진 미움과 분노의 빙산을 녹이는 것입니다. 
요셉이 정말 훌륭한 신앙인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인간이 아닙니까? 살려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동생을 매정하게 우물에 던져넣었다가 팔아버려 이방땅에서 노예와 죄수로 13년의 혹독한 고난을 겪게 만든 형들을 처음 보고 반갑고 기쁘기만 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그런 마음만 들겠습니까? 요셉이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3일 동안 감옥에 넣어둔 것은 그의 마음에 형들에 대한 분노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그 3일 동안 형들은 억울함과 두려움과 근심, 괴로움으로 떨었을 것이고 요셉 역시 그 3일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샜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겪은 13년의 혹독한 고난을 3일 동안 형들에게 맛보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예나지금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서가 아닌 미움을 선택하는 것을 봐도 그렇고 용서의 이야기가 그토록 듣기 쉽지 않은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는 이들은 죄와 악이 저질러놓은 온갖 문제와 고통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원수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지 않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용서가 쉽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진짜 용서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기가 어렵다는 것 때문에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를 선택하려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그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도 용서가 쉽지않은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용서를 위해서는 너무나 큰 값지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값지불은 아들을 십자가에 매어다는 것인데 어떻게 쉬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입었기에 그 은혜의 힘으로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만 은혜의 힘으로는 됩니다. 42장에서 45장 사이에서 요셉은 네 번이나 크게 웁니다. 
(창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창 43:30)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창 45: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창 45: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창 45: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그의 네 번의 큰 울음은 13년의 세월에 쌓인 미움과 원망의 응어리가 남김없이 녹아내리는 과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참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응어리가 다 녹아내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응어리의 빙산을 녹이는 것은 은혜의 햇살입니다. 은혜의 힘으로만 이 불가능한 용서가 가능해짐을 믿으시고 원수마저 용서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화해의 문을 여는 열쇠
둘째는 가해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지난 과오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요셉은 반복해서 형들을 자신들을 팔아버렸던 것과 유사한 상황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시므온을 가두어두고 형들만 돌려보냅니다. 시므온을 배신하면 형들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베냐민을 가두어두고 형들만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베냐민을 외면하면 자신들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팔아버렸던 22년 전 그 때의 사건 속으로 형들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 걸까요? 요셉은 형들이 과연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형들이 22년 전 자신을 팔아버렸던 그 모습 그대로라면 요셉이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한다 하더라도 그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북회담이나 북미회담은 분명 말할수없이 감격스러운 사건이지만 그런 감격만으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진정한 화해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냉정한 이성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참된 화해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자, 과연 형들은 변화되었을까요? 시므온을 버리고 돌아가라는 요구에 형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창 42: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요셉)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창 42: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형제들은 요셉이 알아듣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서로 탄식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의 짐을 늘 진 채 살아왔고 이 고난에 직면하여서는 이 일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들의 뉘우침을 듣고 요셉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합니다. 
(창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러면 형들이 뉘우치는 것을 본 요셉이 왜 즉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습니까? 참된 화해는 뉘우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뉘우치지만 행동으로 돌이키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뉘우치면서 여전히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이들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뉘우침은 쉽지만 돌이킴은 어렵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뉘우침과 더불어 행동의 돌이킴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뉘우칠 뿐 아니라 정말 그런 삶의 방식을 버렸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44장에 이르러는 요셉의 친동생인 베냐민을 버리면 배다른 형들이 살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형들의 반응을 지켜봅니다. 그 때 유다가 나섭니다. 유다는 다른 형제들에게 요셉을 노예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한 형이었습니다. 
(창 44: 31) 아버지(야곱)가 아이(베냐민)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창 44: 33) 이제 주의 종(유다 자신)으로 그 아이(베냐민)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유다는 아버지와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 남아 노예가 되겠다고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유다와 형제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마음으로 뉘우칠 뿐 아니라 행동으로 돌이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본 요셉은 마침내 남아있던 모든 응어리의 빙산이 녹아내려 미움의 둑을 무너뜨리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창 45: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창 45: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마음의 뉘우침과 행위의 돌이킴은 참된 회개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천국의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열쇠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행 3: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뉘우침과 돌이킴은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만드는 열쇠입니다. 남북관계나 북미관계도 그러하고 상처난 부부관계도 그러하고 멀어진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그러하고 깨어진 교우관계도 그러합니다. 
 
자유를 향한 긴 여정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책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의 저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반대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무장투쟁을 이끌다가 반역죄로 투옥됩니다. 27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후 그는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됩니다. 이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정권을 잡았으니 그동안 짓밝혀온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델라 대통령은 흑인들에게 가해자들을 증오하지 않도록 호소합니다. 한편으로 진실과화해위원회를 설립하여 테러와 화형, 총살 등을 저지른 국가폭력가해자들의 범죄를 철저히 조사하고 그들이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면 사면을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을 막고 흑인과 백인들이 공존하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참된 화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요셉에게는 미움과 원망의 빙산이 녹아내리는 것이 필요했고 형들에게는 뉘우침과 돌이킴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쏟아져나오는 은혜의 빛입니다. 이 빛은 물론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온 세상에 가득한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