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6:8-20/눈을 열어주소서

180819 주일설교
잘 안 믿어집니다
예전에 20년이 넘게 신앙생활을 하신 교인과 상담을 했습니다. 대화 중에 아무래도 이 분이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계신가 의심이 들어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어 보았습니다. ‘성도님,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이 분은 그래도 정직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목사님, 저도 믿고 싶은데 잘 안 됩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목사는 이런 답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여쭈어 보지요. ‘믿기 위해 무엇을 해보셨습니까?’ ‘뭐, 교회도 가보고 이것 저것 해 보았는데 잘 안 믿어져요.’ ‘그러면 성경을 공부해 보셨나요? 기도는 어떻게 해보셨습니까? 예수님에 대해 배워보신 적이 있나요?’ 몇 가지 질문을 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내와 겸손을 가지고 구체적인 노력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금방 드러납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려니와 그저 교회에 계속 다니다보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태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둘째 어떻게 믿음을 얻는지 모릅니다. 셋째 믿음의 장애물이 있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오늘은 본문말씀을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보려 합니다. 먼저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엘리사 선지자를 잡으러온 아람군대를 물리치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믿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먼저는 믿음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람은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내내 갈등관계에 있던 주적이었습니다.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왕을 잡기 위해 여러 차례 매복작전을 펼쳤는데 이를 번번이 선지자 엘리사가 꿰뚫어보고 이스라엘왕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매번 매복작전이 실패하는 이유가 엘리사 때문인 것을 안 아람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특공대를 파견합니다. 엘리사가 머물던 도단성을 특공대가 밤새 포위하고 아침에 일어난 사환은 이를 보고 겁에 질립니다. 15절입니다. 
(왕하 6: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꼼짝없이 잡혀 죽게생겼습니다.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겁에 질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늘 그러하듯 말입니다. 그런데 같이 곁에 있으며 똑같은 현상을 보고 있는 엘리사는 전혀 겁에 질리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왕하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왜 사환은 두려워하는데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보느냐, 보지 못 하느냐입니다. 엘리사는 다른 이들이 보지 못 하던 아람군대의 계략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이 순간에도 사환이 보지 못 하는 영적 실재를 봅니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내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늘 지키는 천군천사가 보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봅니까?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보십시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 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 하는 실재들을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섭리와 구원을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자녀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군대 천군천사들을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이 영적 실재를 보았던 사도 요한은 엘리사처럼 이렇게 우리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성령)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엘리사와 사도 요한은 이 영적 실재를 보았기에 그들을 둘러싼 원수들의 위협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영적 실재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원수에게 둘러쌓여도, 고난과 시련에 짓눌려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과 전도자들은 매맞고 조롱당하고 감옥에 갇혀서도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을 둘러싼 원수들입니까? 고난과 시련입니까? 아니면 성령님과 천군천사들입니까? 우리와 함께 한 자들이 그들과 함께 한 자들보다 많고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을 보고 깨닫고 담대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지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요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예수님은 못 보는 이들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보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 분의 말씀입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지막 세 번째에 오늘은 주목합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엘리사 사환의 닫힌 믿음의 눈을 누가 어떻게 열어주었습니까? 엘리사가 중보기도를 통해 열어주었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왕하 6:17) (엘리사가)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의 중보기도는 사환의 믿음의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품고 그 말씀을 겸손히 들으며 진지하고 끈질긴 기도를 시작하면 됩니다. 이 세 가지를 끈질기게 실천하지 않으며 왜 믿기가 힘드냐고 한다면 공부를 안 하면서 왜 성적이 안 오르냐고 불평하고 나무를 심지 않고 왜 열매가 열리지 않느냐고 불평하고 그물을 던지지 않고 왜 물고기가 안 잡히냐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눈을 뜨기를 바라는 가족, 친지 그리고 이웃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그리스도를 소개받게 하고 성경을 공부하게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전도입니다. 교회 방문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으니 그 때는 중보기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그들의 눈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 기도를 시작하고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특별한 사람이니 목사 같은 사람들이 기도해야 믿음의 눈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야고보서는 엘리사의 스승이었던 엘리야 선지자를 예로 들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약 5: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말은 우리도 기도하면 엘리야, 엘리사처럼 기도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당장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사처럼 기도로 믿음의 눈을 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믿음의 장애물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믿음의 장애물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것은 믿음의 눈을 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가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왕하 6:18)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의 기도는 사환의 눈을 열어주기도 했지만 아람군대의 눈을 닫게도 만들었습니다. 엘리사는 왜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악한 의도는 눈을 어둡게 만듭니다. 이것은 악한 마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 대해 다시 예수님의 말씀 보십시오. 
(요 9: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예수님의 심판이 여기 있습니다. 스스로 본다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그 눈이 어두워져 영적 세계를 보지 못 합니다. 스스로 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세상 이치를 자신이 제일 잘 안다는 교만을 말합니다. 그 교만은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놓습니다. 이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의 눈을 뜨지 못 합니다. 이 교만을 버리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수십 년을 해도, 직분을 받고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도 영적인 장님으로 살다가 갑니다. 하나님 대신 정욕과 탐욕과 자아를 우상으로 삼고 살다가 갑니다. 여러분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이런 교만과 악함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 하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다
세계적 물리학자이자 원자력전문가인 정근모 박사는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MIT와 뉴욕공과대학 등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 만성신장염을 앓는 아들의 건강문제로 무척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의 신장을 아들에게 이식해주기까지 했지만 건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뇌출혈 등을 겪으며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급기야 두 번이나 자살시도를 하는 아들을 보며 정말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신앙에서 답을 찾으려고 기도하며 성령체험을 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좀처럼 응답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예배 때에 에베소서 2장의 말씀으로 설교를 듣는데 여느 때와 달리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근모야, 너는 아들로 인해 감사해본 적이 있느냐?’ 갑자가 마음에 원망이 솟구쳤습니다. ‘아니, 제 아들로 인해 불평을 하면 했지, 어떻게 감사를 합니까? 저처럼 공부도 잘 하고 성공해서 부모님께 기쁨을 드려야지, 제 아들은 어릴 때부터 늘 아파서 제 속을 얼마나 썩이는지 주님은 정말 모르십니까?’ 그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진후는 교만한 너와 네 가족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그 아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네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왔겠느냐?’ 그 순간 정근모 박사의 눈이 열리며 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이 때까지 내가 진후를 돌보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진후가 나를 구원의 길로 이끌었구나. 진후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나 때문에 진후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었구나.’ 그 순간 마치 폭포수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정근모 박사는 비로소 그와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불평과 원망과 걱정과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눈을 뜨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섭리와 구원을 보고 감사와 찬양, 평안과 담대함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요? 엘리사의 사환처럼 우리를 둘러싼 고난과 시련을 보고 떨고 있습니까,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와 여러분의 눈이 열리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