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6:27-30/죽어도 족하니라

180916 주일설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1997년에 출간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은 뉴욕타임즈에서 205주 동안, 약 4년인데요, 비소설분야 베스트셀러에 머물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루게릭병에 걸려 죽어가던 모리 슈워츠 교수를 14주 동안 그 제자인 기자 미치 앨봄이 매주 화요일 만나며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죽어가는 어느 교수의 삶과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충고가 담긴 이 책이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 중 하나를 이 책이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서구인에게 복음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답을 주는 신을 부정하는 현대인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죽음은 무엇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제목으로 단 장에서 모리 교수는 제자 미치에게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네.’라고 담담히 말합니다. 영원히 살지 못하니 부질없는 일에 목숨 걸고 발버둥치지 말라,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즐기라 정도의 충고도 소개됩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힘겨운 병에 걸려 죽어가는 학자가 보여 준, 두려움이나 안달함 없이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죽음에 직면하여 갖고 싶은 태도의 모델을 본 것은 아닐까요? ‘아,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런 생각 말입니다. 모리 교수는 현대인이 좋아하는 ‘품위 있는 마지막’의 훌륭한 모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태도는 삶이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며 죽음 이후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너도 모르지만 나도 모르니 흉한 꼴 보이지 말고 조용히 가자’는 식의 자기위로로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솜사탕처럼 그럴 듯 해보이지만 아무 알맹이는 없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솜사탕에 사람들이 위안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현대 서구인들이 답이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나니 그 어디서도 삶과 죽음에 대한 진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이런 솜사탕 같은 충고라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답답하고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인정을 하든 않든 현대인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그 의미를 알기 힘든 미지의 세계요, 감당하기 힘든 절대공포입니다. 이 죽음에의 공포를 극복하는 길이란 모리가 했듯이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죽음에 대해 극적인 태도변화를 경험한 야곱에게서 들을 수 있습니다. 
 
성취되는 약속
지난 주에 우리는 야곱 일가가 애굽으로 이주하기 위해 출발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 일가가 애굽에 도착하여 요셉을 만나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46장 8절부터 27절은 이주하는 야곱 일가를 일일이 소개하는데 그 전체내용을 27절이 이렇게 요약합니다. 
(창 46:27) …야곱의 집 사람으로 애굽에 이른 자가 모두 칠십 명이었더라.
70이란 수는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7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에 안식일을, 7년째에 안식년을 그리고 7번째 안식년이 지난 다음 해를 희년으로 삼으신 것처럼 성경에서 7은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 열 배인 70은 완전함과 충만함 그리고 가득함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70명은 비록 작은 부족 정도의 크기이지만 거대한 민족으로 자라기 위한 싹이 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그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케 하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일점일획도 어긋남이 없이 성취됩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비록 더딘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모두 성취됩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두려움 없이 좇아가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요셉의 부활
28-30절은 야곱이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 요셉과 재회하는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죽음에 대한 야곱의 변화된 태도를 발견합니다. 그는 이전에도 여러 번 죽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죽음은 슬픔과 절망의 상징이었습니다. 
(창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죽음의 자리)로 내려가 아들(요셉)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창 42:38)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베냐민)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요셉)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죽음의 자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두 번 모두 야곱은 죽음을 슬픔과 절망, 두려움의 결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는 것을 본 후 그에게 죽음은 기쁨과 소망, 만족의 결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30절을 보십시오. 
(창 46: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슬퍼서 죽겠고 죽음은 절망 그 자체였는데 이제는 죽어도 만족이 있습니다. 슬프기는커녕 너무 좋아서 죽을 지경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런 극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무엇입니까?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의 살아있음입니다. 다시말해 요셉의 부활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사랑이었고 기쁨이었고 희망이었고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 요셉의 부활은 야곱에게 형언할 수없는 기쁨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상징인 죽음을 소망과 기쁨의 상징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비밀은 바로 이 부활의 소식 뿐입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죽음의 허무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 합니다. 이 진리를 인류 역사에 유일하게 벌어진 실제 부활사건을 목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제자들은 큰 슬픔과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갔고 숨은 곳의 문을 잠그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죽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죽음은 그들에게도 절대적 공포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들은 모두 새 소망과 기쁨으로 충만하여서 담대하게 문을 열고 나와 주님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렇게 소망과 담대함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생명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죽음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제자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아의 죽음을 스스로 선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옛자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자아의 죽음,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을 향하여 승리를 선포하기까지 합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어떻게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였다는 말입니까? 옛 자아가 죽지만 새 자아로 태어나며 육체가 죽지만 영으로 살아나서 마침내는 새 육체로 부활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고 자신들의 부활을 믿었기에 육체의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부활을 주시는 주님을 사모하여 어서 속히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죽어서)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죽음을 정복한 이들
평생 호스피스 전문간호사로 근무한 재닛 웨어는 자신의 경험을 모아 쓴 ‘평화로운 죽음’이란 책의 한 장에서 왜소한 몸에 붉은 머리칼을 가진 신사 루디의 마지막 몇 주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재닛이 방문할 때마다 침대에 누운 루디는 읽던 성경의 한 구절을 그녀에게 열광적으로 읽어주며 탄성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재닛, 나는 노아를 곧 만날 겁니다.’ ‘모세, 나도 진짜 모세와 같이 살게 될 거예요.’ 루디의 얼굴은 빛을 발하고 있었고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는 남태평양의 어느 섬으로 휴가를 떠날 준비를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죽음을 피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간호하는 재닛마저 그 죽음 이후의 세상을 지금 이 세상 못지않은 실재처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하루는 재닛이 그에게 웃고 있는 예수님의 그림을 가져다 주자 루디는 ‘그래, 이것이 내가 뵙고 싶은 예수님의 모습이다.’라며 눈가가 촉족해졌습니다. 루디는 그 그림을 자신의 침대 맞은 편에 붙여달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루디의 아내로부터 그가 숨을 거두었다는 연락을 받고 재닛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루디는 웃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커다란 미소를 띈 얼굴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성도는 죽음을 정복한 이들입니다. 죽음을 정복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딤후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죽을) 시각이 가까웠도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죽음)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죽음은 애써 담담히 마주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고대할 것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담대함이 있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