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10:19/나그네들의 교회

181104 주일설교
난민과 이민자
<영상>
이번 주 토요일 저녁 7시에 팔팍하이스쿨 강당에서 우리교회 청년부와 이민자보호교회네트워크가 함께 요셉이란 제목으로 연극공연을 합니다. 오늘날 이민자 문제는 난민문제와 함께 세계 각국에서 대두되는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입니다. 유럽은 원래 이민자와 난민들이 많이 들어와 사는 지역이었습니다만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리아 내전을 피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기 시작한 수십 만의 난민들로 인해 전에 없던 난감한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민자와 난민문제는 늘 뜨거운 감자였습니다만 중간선거를 앞두고 캐러밴이라 불리는 온두라스 등 중남미에서 빈곤과 폭력, 마약사태 등으로 탈출하여 미국으로 향하는 이주자 행렬이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한국은 무풍지대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만 최근 들어 다문화가정,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난민사태 등으로 더 이상 남의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있습니다. 한편 미얀마 정부의 박해를 피해 떠돌아다니는 로힝야족 사태는 난민문제가 선진국의 것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사실상 전 세계가 지구촌이 되어 교통과 통신으로 연결되고 한 쪽에는 안전과 풍요가, 다른 쪽에는 내전과 빈곤이 존재하는 한 그 어느 나라도 난민과 이민자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우리교회 청년부와 이민자보호교회네트워크가 이민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연극을 올린 것일까요? 교회는 이 문제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마땅할까요? 이 문제는 국가와 지역, 문화와 개별사례마다 많은 차이가 있기에 이것만이 정답이라거나 저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일반화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시간에는 성경과 교회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바 이 문제를 향해 교회가 취해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한인 이민자 교회
우리교회 청년부나 이민자보호교회네트워크에 속한 한인교회들은 왜 이런 문제에 관심을 촉구하는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우리 한인교회는 곧 이민자들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이민자이거나 난민입니다. 이민이란 국제연합에서 정의하기를 1년 이상 타국에 거주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폭이 넓은 개념이고 난민이란 어떤 이유로든 박해를 피해 모국을 떠난 이들을 가리키는 비교적 좁은 개념이지만 모국을 떠나 타국에 몸을 의지해 살아가고자 하는 나그네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거나 남미 등 다른 나라에 머물다 미국으로 왔거나 비교적 오래 전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운이 좋아 합법적인 신분으로 머무르는 이민자일수도 있고 운이 나빠 서류미비상태일 수도 있고 혹은 난민의 처지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뉴저지장로교회는 거의 대부분 이민자와 난민으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EM성도과 교육부의 자녀들을 제외하면 미국에서 태어난 이가 얼마나 됩니까? 교회는 마땅히 그 교회의 구성원들과 소속한 공동체를 섬겨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 한국을 위해 기도하고 미국교회는 당연히 미국을 우선으로 축복하고 중국교회는 중국복음화를 위해 제일 먼저 수고하는 것이 마땅하듯 이민자 교회는 이민자들의 복지와 안전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한인들은 난민문제에 대해 진 빚이 없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한인은 여러 나라에 난민문제로 많은 빚을 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는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주민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연해주 등으로 건너가 목숨을 건지며 동시에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난민신세였습니다. 백범 김구선생과 상해임시정부 인사들은 당시 중국정부가 난민으로 맞아주지 않았다면 추방되어 일제에 의해 제대로 된 투쟁 한 번 못 해 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이민자의 나라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미국이 이민자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2년 후인 2020년이면 102명의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오늘날의 미국 메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착한 지 꼭 400년이 됩니다. 오늘날로 치면 난민이나 다름없는 그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 때 원주민들은 옥수수와 가죽 등을 가져다 주어서 온정을 베풉니다. 제임스 타운의 존 스미스는 그 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식량은 떨어지고 굶주림에 지쳐 있을 때 원주민들이 그 기미를 알아채고 습격해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식량을 가지고 와 우리를 구해준 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청교도들에게 옥수수 종자를 가져다 죽고 농사를 가르쳐준 인디안들의 추장의 이름인 ‘마사소잇’을 따서 이 주의 이름을 메사추세추라고 부릅니다.
사실상 네이티브 아메리칸을 제외하고 오늘날 미국 땅에서 사는 이들 중 이민자가 아닌 이들이 있습니까? 조금 먼저 왔느냐 늦게 왔느냐의 차이일 뿐 모두가 이민자요, 난민으로 이 나라에 들어와 사는 것입니다. 미국이 오늘날 세계 초강대국이 된 것은 수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재능과 헌신을 이 나라를 위해 쓰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폰 신화를 일군 스티브 잡스는 잘 알려진 것처럼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입니다. 페이스북 CEO인 마크 저커버크는 폴란드 이민자의 자손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독일 이민자 3세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케냐 이민자의 아들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이민자입니다. 이런 예는 끝도없이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민자가 일군 나라이며 이민자의 에너지를 통해 성장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나라보다 이민자 문제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민자의 교회
마지막 이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곧 이민자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초가 된 예수님의 제자들 수는 12명입니다. 그들의 수가 12명이었던 이유는 교회가 구약의 열두 지파를 대신하는 영적 이스라엘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어떤 이들이었습니까? 그들이야말로 곧 이민자요 난민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민자였습니다. 이삭과 야곱도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흉년을 피해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는 난민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집트가 그들에게 식량을 주고 환대해주지 않았다면 야곱 일가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십니까? 
(출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외국인 이민자, 난민들을 학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신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수동적으로 학대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 이스라엘도 나그네, 이방인, 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 이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이어받았습니다. 오늘날 전세계 교회는 신약의 기준으로 보면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중심이었던 당시 교회에 유입된 나그네들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일 것인가, 말것인가 또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입니다. 그들에게 모든 율법을 유대인들과 같이 지키게 하자는 바리새파 유대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이민자와 난민수용을 더 까다롭게 해야한다는 오늘날 일련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반면 그들에게 오직 믿음을 제외한 어떤 율법도 요구하지 말자는 바울 사도와 열두 사도들의 주장은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 교회는 바리새파 유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아닌 사도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방인들의 장벽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덕분에 저와 여러분들은 생전 듣도보도 못 한 온갖 규정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 교회는 이스라엘 땅에 갇힌 민족종교가 아니라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로 뻗어가는 세계적 교회로 성장한 것입니다. 
우리 인종끼리 우리 민족끼리 우리 나라 사람들만 우리 땅의 자원은 우리만 사용하고 우리 땅의 기회는 먼저 이 자리를 차지한 우리들만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리새파 유대인들이라면 할 법한 주장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세상의 사람들이라면 할 법한 주장일지 모르나 믿음의 조상 때부터 우리는 나그네였다고 고백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이 사명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할 주장이 아닙니다. 
‘자, 우리가 당신들 땅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구호품을 좀 나눠주기는 할테니 거기서 예수 믿고 그 땅에서 사세요. 우리는 우리 땅 우리 자원 우리 기회를 당신들과 나눌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이 총에 맞아죽든 마약전쟁에 희생되든 굶주림과 학대에 시달리든 그건 미안하지만 당신들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큰 위선이 어디 있습니까? 그럴거면 복음 전하러 오지나 말지 왜 와서 우리에게 형제니 자매니 온갖 달콤한 말은 다 해놓고 이제 와서 죽어가는 이들을 못 본 척 해서 더 큰 배신감을 주냐고 하지 않겠습니까? 제국주의 선교시대에 서구열강은 선교사를 앞세워놓고는 한편으로는 식민지를 건설하여 얼마나 많은 자원을 착취하고 정치, 경제를 종속시켜 이권을 빼앗아가고 자기들 마음대로 국경선을 그어 온갖 부족전쟁의 씨앗을 뿌려놓고 이제와서 전쟁에 희생되어 가는 사람들을 너희 문제니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위선이 어디 있냐는 말입니다. 적어도 교회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래도 고아와 객과 나그네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는 교회는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 교회는 이민자와 난민들, 나그네들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난민이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탄생하시자마자 헤롯왕의 칼날을 피해 아버지 요셉,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이집트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마 2: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마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난민의 고통을 아시는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난민과 이민자와 나그네들의 눈물을 모른 척 한다면 과연 우리들의 믿음이 진짜일 수 있을까요? 저는 믿기를 제가 6.25 전쟁의 피난민 행렬에 섞여있지 않고,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물새는 조각배에 앉아 있지 않고, 아이들을 등에 업고 총과 마약, 빈곤과 독재가 없는 나라에게 키워보겠다고 위험천만한 수만 리 길을 걷는 행렬에 정처없이 걷고 있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번이라도 그들 대신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우는 자들 곁에서 함께 우시는 주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