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8:36-37/춤추고 자해하다

181230 주일설교
일천번제
예전에 한 교우께서 제게 이런 상담을 해오셨습니다. 기도제목 한 가지를 응답받기 위해 일천 번제를 새벽제단에 쌓고 있는데 이제 사백일 제단을 쌓았고 육백일 제단을 더 쌓아야 하는데 중단하면 안 되겠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큰 기도제목인지라 일천 번제를 드리겠다고 작정은 했는데, 일천 일이면 꼬박 3년을 쉬지않고 새벽기도를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이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중단하려니 기도응답이 안 될 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여 힘이 드셨던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답을 드리기를, 첫째 열왕기상 3장에 등장하는 솔로몬왕이 드린 일천 번제라는 표현은 일천 번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 아니라 일천 마리의 동물로 희생제사를 드렸다는 말이고, 둘째 일천 번이라는 횟수에 기도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주술적인 효과도 없으니 일천 번 새벽기도 드리면 응답받고 일천 번 못 채우면 응답을 못 받으리라는 염려를 하지 마시고 자유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일부 한국교회에서 예전에 이 일천 번제라는 표현을 일천번의 제사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하고 특별한 기도응답을 받는 방법으로 일천 번 예배를 드리라는 식으로 가르쳐왔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널리 퍼졌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주술적 사고의 한 형태입니다. 주술은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인데 부적이나 주문 혹은 특정행동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어서 이를 통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식의 생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주술적인 믿음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술과 믿음
오늘 읽은 본문은 갈멜산 대결에서 엘리야가 기도응답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미 바알의 제사장들이 하루 종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응답을 받지 못 했습니다. 이어지는 엘리야의 기도장면은 그들과 사뭇 다릅니다. 먼저 26절과 28절에서 바알 제사장들의 처절한 기도모습을 보십시오. 
(왕상 18: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왕상 18: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부르짖어도 바알의 응답이 없자 그들은 춤을 추다가 급기야 자해를 합니다. 춤과 자해가 신의 응답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들은 춤과 자해를 통해 움직이지 않는 신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오늘 본문 36절입니다. 
(왕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는 어떤 춤이나 자해와 같은 주술적인 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행위의 의미는 그의 기도 중에 나옵니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신을 움직이기 위해 인간이 해야 하는 어떠한 노력도 아닌 이미 구원을 행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타종교와 다른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신앙은 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인간의 노력과 희생 혹은 주술적        시도    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것들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르는 인간의 굳은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일하십니다. 인간을 위해 구원역사를 행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인간에게는 겸손히 그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말씀대로 구원의 길을 좇아가는 것 뿐입니다. 이 겸손한 순종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왜 응답받는가
우리의 기도 역시 우리의 정성으로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은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이른 새벽에 아무도 물 뜨러오지 않은 우물에서 가장 먼저 정결한 물 정화수를 길어와 천지신명께 지극정성으로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당연히 이런 지극정성이 친지신명을 감동시켜 기도의 응답을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런 심성을 가진 한국인들은 전 세계 어느 나라 기독교에도 없는 새벽기도를 얼마나 뜨겁게 드리는 지 모릅니다. 한국교회 선교초기에 미국북장로회 파송으로 조선에 온 조지 맥쿤 선교사는 선교보고서에서 갓 태어난 한국교회 예배의 특징으로 통성기도와 더불어 새벽기도를 꼽았습니다. 사실 새벽기도의 기원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이시고 외국교회에도 새벽에 일어나 기도시간을 갖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다만 한국교회처럼 교회에 함께 모여서 기도회를 가지는 교회만 없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새벽기도회가 만약 정화수를 떠다놓고 빌던 우리 조상들의 그것처럼 지극정성의 간구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응답을 얻게 해주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드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술적인 신앙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응답을 받는 이유를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요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분의 자녀가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드리는 기도를 자녀의 기도로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구할 때 새벽마다 방문 앞에서 엎드려서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 ‘아버지, 제발 지우개 살 돈 좀 주세요~’ ‘어머니, 오늘 저녁에는 계란찜 좀 먹게 해 주세요~’ 
(마 6:32)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의 필요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녀된 우리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염려말고 믿으시기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을 앎
아, 그럼 우리가 새벽마다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기도는 한 번만 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왜 계속해서 기도하는지를 오늘 본문 다음 절이 잘 알려줍니다. 
(왕상 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목적 곧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목적은 기도를 통해 중요한 진리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첫째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압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기 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기도생활의 첫째 목적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그 분과 친해진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기도는 기도제목이 응답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그 분을 알고 친해진다는 말입니다. 
제가 일을 할 때면 아내가 한 번씩 말을 건냅니다. ‘여보, 소파로 좀 와보세요.’ 문제해결식 사고방식을 가진 저는 부르는 목적이 궁금합니다. ‘왜?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아내는 말하지요. ‘일은 무슨? 그냥 커피 마시자고.’ 이제는 아내께서 부르시면 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종합니다. ‘부르신 곳에서 나는 커피 타내. 어떤 상황에도 나는 달려가네.’ 아내와 커피를 마시는 시간의 목적은 문제해결이 아닙니다. 그냥 아내와 내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요. 친밀함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 시간을 통해 아내와 저는 더욱 친밀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시간의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그렇기에 기도시간이 일방적인 부르짖음으로 끝나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 딴 생각하지 말고 똑똑히 들으세요. 내가 필요한 것 이것, 이것입니다. 잘 들으셨죠. 그럼 빨리 해결하세요.’ 이런 식으로 부부관계가 형성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 문제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듯,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의 목적도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새벽 QT하고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이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친밀해지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마음을 돌이킴
기도생활의 둘째 목적은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도를 내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런 면이 기도생활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친밀해져가면 갈수록 이런 기도는 점점 덜 하게 됩니다. 
철부지일 때 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 무조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생각이 자라고 철이 들어 엄마, 아빠를 알고 세상을 알면 점점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이 줄어듭니다. 오히려 부모가 원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어 갑니다. 이런 변화가 기도생활에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그 분의 뜻을 더 알면 알수록 우리가 간절히 원하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이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들을 구하게 됩니다. 이 때 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이고, 이 때 일어나는 일이 마음의 돌이킴입니다. 기도생활의 목적은 바로 이것,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눅 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항상 친밀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시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았고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굴복시키는 마음의 돌이킴을 기도를 통해 경험하셨습니다. 이 돌이킴을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간곡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도의 반복, 이 기도의 간절함을 하나님을 기어이 설득시키겠다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굴복하기 어려운 내 뜻을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순종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기도시간에 간구는 점점 줄고 그 대신에 감사와 찬양이 점점 늘어납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키게 되면 기도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 애가 닳고 춤을 추고 자해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쁨의 기도
많은 이들이 기도를 자해하는 바알의 제사장처럼 괴롭게 합니다. 응답하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 정성을 보여야 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하고 않되면 자해를 하듯 자신을 괴롭게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기도생활이 기쁨이 아니라 짐이 됩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기쁨과 감사가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이 찬송은 립서비스나 과장이 아니라 실제경험의 고백입니다. 어떻게 기도시간이 드라마보는 것보다 더 즐겁고 기쁩니까? 기도가 선하시고 귀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교제요,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점점 닮아가는 시간이요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와 대화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듯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는 바알제사장들의 기도에 가깝습니까, 엘리야의 기도에 가깝습니까? 우리 하나님과의 교제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