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8:38-40/은혜로 적셔진 예배

190112 주일설교 엘리야8
경외감
LA에서 거주할 때 손님이 오시면 꼭 모시고 가는 곳이 Grand Canyon입니다. 영국 BBC방송국 선정 ‘죽기전에 꼭 가봐야할 여행지’ 1위에 오른,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는 거대하고 장엄한 캐년 앞에 선 사람들은 한결같은 반응입니다. 장모님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억! 억!’ 하시더니 입을 딱 벌리시고 뭐라 말씀을 못 하십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이고, 세상에나, 세상에나… 아이고 맙소사’만 연신 반복하십니다. 그 날 이후 장인어른은 미국에 대해 섣불리 아는 체라도 하는 친구에겐 어김없이 한마디 훈수를 놓으십니다. ‘아, 그랜드캐년 가 봤는가? 안 가 봤으면 말을 하덜 말어.’ 제 말을 듣고 다녀오신 교우들도 ‘목사님 말씀 듣고 설마 했는데 정말 억 소리밖에 안 나더라고요.’라고 거드셨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수준을 뛰어넘는 압도적 존재와 직면할 때 느끼는 감정을 경외감이라고 합니다. 그랜드캐년과 같은 거대한 자연을 마주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느끼지만 사실 우주전체는 고사하고 태양계만 보더라도 그랜드캐년은 티끌보다 작은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 앞에서도 경외감을 느낀다면 그 캐년을 품고 있는 지구와 지구를 품고 있는 태양계와 태양계를 품고 있는 은하계와 그 은하계를 품고 있는 우주를 창조하신 분 앞에 서게 될 때 얼마나 큰 경외감을 품게 될까요? 이것이야말로 참된 예배자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심과 그 은혜의 놀라움을 발견할 때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런 경외감 앞에 압도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들은 갈멜산 정상에 불로 임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드린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응답의 장면이 38절입니다. 
(왕상 18: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불이 내려서 번제물을 태웠다는 것은 엘리야가 드린 제물을 받으셨다는 의미이고 이를 신약의 표현으로 바꾸면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통상적인 제사에서는 나무를 사용하여 번제물만 태웁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제일 위의 번제물과 그 번제물을 태우기 위해 밑에 깐 나무와 그 나무를 올려놓은 돌로 된 제단 그리고 제단을 쌓은 바닥의 흙과 주변 도랑의 물까지 완전히 태워버립니다. (그림으로 이 장면을 한 번 보십시오.) 또한 불은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 때에 불의 혀같이 임한 성령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제사는 성령님의 임재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셔서 예배를 받으시자 그 앞에서 백성들은 압도되고 경외감에 사로잡힙니다. 39절입니다.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이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이 때까지 바알숭배를 받아들여 우상숭배에 빠져있느라 여호와의 제단이 다 무너져있어도 신경도 쓰지 않던 이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엘리야가 여호와를 섬길지, 바알을 섬길지 선택하라고 호통을 쳐도 묵묵부답이었던 이들이 아닙니까? 그런 그들이 여호와 앞에 엎드러져서 바알이 아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 앞에서 압도되고 경외감을 느끼며 경배합니다. 
그들은 이제 일어나서 무엇을 합니까? 그들의 삶을 병들게 했던 바알숭배를 뿌리뽑습니다. 40절입니다. 
(왕상 18: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병들게 했던 바알숭배를 뿌리뽑는 개혁을 시작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충만한 예배를 드리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참 신인 것을 깨닫게 되고 둘째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삶이 변화됩니다. 이것이 예배의 영광입니다. 예배자의 축복입니다. 이런 예배의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압도되는 예배 
우리의 모든 예배가 항상 이런 경외감으로 충만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신앙인이 하나님을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신뢰하기 위해서는 이런 경험이 꼭 필요합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의 불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한 후 시내산에서 영광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들은 두고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때 홍해사건과 시내산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회상시키며 여호와만을 섬길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사로잡힌 예수님을 보고 황홀경에 사로잡혔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 영광 앞에서 압도되어 쓰러지고 삶이 변화되었으며 평생 그 기억을 의지하며 선교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는 마치 젊은 시절 목숨을 걸 정도로 뜨겁게 사랑하던 추억이 노년이 되어서도 서로에게 신실하도록 해주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육체는 쇠하여 남편에게도 그 때의 늠름함이 없고 아내에게도 그 때의 아름다움이 사라져 주름살밖에 남지 않았어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는 예배는 우리가 피곤한 일상, 거친 세상, 끝나지 않는 고난에 지쳐서 믿음을 지킬 힘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지켜주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는 예배를 드리기를 소원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예배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으로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린 일이지만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가 있습니다. 이 자세를 오늘 본문이 또 보여줍니다. 39절을 다시 보면 보통 제단에는 없는 특이한 요소가 있는데 바로 물입니다. 왜 제단 주변에 도랑의 물이 흐릅니까? 엘리야가 이 제사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32-25절입니다. 
(왕상 18:32) …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왕상 18:33) …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왕상 18: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왕상 18: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엘리야는 통상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제단 주변으로 약 10kg의 곡식을 채울 수 있을만한 도랑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제단 위에 물을 부어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바닥까지 완전히 젖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 제단을 태울 불이 인간의 힘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제물을 태울 불은 오직 하늘로부터 임하여서 물이 끌 수 없는 불이어야만 합니다. 
이는 예배에 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어떤 공로로도 예배를 예배되게 할 수 없고,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도록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예배의 성령을 부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예배에 복과 은혜를 부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함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여야 합니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은총입니다. 예배자 자신의 헌신과 공로와 수고와 자격은 예배의 관심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참된 예배를 드리는데 실패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은 누가복음이 아닌 내가복음을 항상 읽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고 내가 이런 자격이 있고 내가 기분이 좋고 내가 기분이 언잖고 내가 중요합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결단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이 왕노릇하려고 하니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꾸짖은 이의 어리석은 태도를 보십시오.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여러분의 예배는 누가 주인공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드러나는 예배가 아닙니까? 하나님 홀로 주인공 되시고 높임 받으시는 참 예배를 드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은총이 흘러넘치는 예배
그런데 제단에 붓는 물은 불이 붙기 어렵게 만드는 기능 외에 또 한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삼상 7:6의 사무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상 7: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사무엘의 시대에 이스라엘이 오랜 우상숭배로 국력이 약해져 블레셋의 침공에 시달리게 되자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여 미스바 대각성집회를 엽니다. 이 때 그들은 자신들의 통회하는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부음을 상징하는 물을 길어 부으며 회개를 합니다. 엘리야가 제단에 넘치도록 물을 붓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회개의 전통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렇게 흘러넘치도록 부은 물을 하늘에서 내린 불이 깨끗하게 핥아 말려버립니다. 하나님이 이 회개를 받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는 물 붓듯 통회하는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 이 번제물과 땔감나무와 돌제단과 흙이 물에 흥건히 젖었듯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는 회개의 눈물로 흥건히 젖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러 올 자격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가 감히 예배의 자리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을 보십시오.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어떤 예배자도 이 세리보다 당당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도, 선교사도, 어떤 오랜 신앙연륜을 가진 자도, 어떤 선교와 수고와 헌신과 희생을 한 순교자도 이 세리보다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와 공로를 쏟아부어주시는 은혜를 힘입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하나님의 그 크심과 영광과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에 압도되어 경외와 감격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이 압도되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에는 항상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죄인들을 위대한 군사로 만드시는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흘러넘쳐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예배에는 이런 은혜가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이런 은혜를 의지하는 통회와 감격의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제단이 이렇게 눈물과 은혜로 적셔지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