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19-24/성전이냐 예배당이냐

190303 주일설교
성전이냐 예배당이냐
오늘 설교는 안식일이냐, 주일이냐는 제목의 설교에 이어지는 일종의 시리즈 설교입니다. 시리즈의 주제는 신앙에 대한 이해 바로잡기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이냐, 주일이냐가 주일에 대한 이해를 바로 잡는 설교였다는 오늘 설교는 예배당에 대한 이해를 바로 잡는 설교입니다. 안식일이면 어떻고 주일이면 어떻냐, 성전이면 어떻고 예배당이면 어떻냐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실 수 있는 물에 염분이 단 3%만 섞이면 못 마시는 바닷물이 되어버리듯 신앙도 사소해 보이는 그릇된 이해 때문에 얼마든지 병들 수 있습니다. 3주간의 설교를 제대로 들으셨다면 더 이상 주일을 안식일이라 부르지 않고 주일성수를 안식일 규정준수로 오해하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팰팍 성전, 오클랜드 성전이라는 표현을 쓰고 들어오셨을 겁니다. 거룩한 전이라는 뜻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무엘하를 보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기로 마음먹자 여호와께서 나단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하 7: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삼하 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이 구절이 보여주듯 성전은 하나님이 사시는 집,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고 이해됩니다. 이런 이해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여인이 말하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왜 성전이냐
(요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우리 조상들(사마리아인)은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유대인)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시온산)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은 멸망한 북왕국의 후손인 사마리아인들과 남왕국의 후손인 유대인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를 극도로 멸시하며 사사건건 반목했는데요, 그 중에서도 성전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는 오랫동안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북왕국의 중심도시였던 세겜에 있는 그리심산에 성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왕국의 중심도시였던 예루살렘 시온산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왜 서로 성전이 자신들 거주지의 중심도시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까요? 그래야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있는 것이 되고 그 결과 자신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진정한 후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을 누가 가지느냐는 온갖 이해관계를 해결하는 문제에서 크게 유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장차 이 팔레스틴 땅 전체의 소유권을 누가 주장할 수 있느냐의 문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국과 일본이 독도라는 조그만 섬을 놓고 갈등하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즉 이들이 성전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를 놓고 갈등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서의 성전을 소유함으로써 얻게 될 엄청난 이익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 우리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어려웠던 시절 일부 목회자들이 단지 이해의 부족으로 구약의 예를 따라 그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배운 성도들이 그렇게 부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배당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으로 규정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여러가지 이익에 대한 욕망도 숨어있습니다. 그 이익은 어떤 것일까요? 
 
성전건축을 위하여 
첫째, 예배당 건축에 교인들을 동원하기가 쉽습니다. 지난 세기 한국교회 성장의 상징은 거대한 예배당 건축이었습니다. 신학생 시절 심심찮게 저는 새 예배당 건축을 필생의 업적이나 되는 듯 은근히 자랑하는 선배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서울 망우동에서 부목회자로 섬기던 시절 저희 교회 맞은 편에는 주변에 어떤 상가나 아파트보다도 더 큰 고딕양식의 거대한 모교회 예배당이 서 있었습니다. 허름한 망우동 일대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예배당 내부는 층마다 당시로서는 꽤 세련되어 보이는 예배실과 결혼식장, 식당, 스포츠시설 등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성전건축에 있어서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이런 대형예배당을 이미 건축한 교회와 언젠가는 건축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대형예배당을 건축하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그 돈은 당연히 교인들의 헌금으로 마련할 수밖에 없고요. 교인들이 기꺼이 헌금을 하게 하려면 이 곳이 성전이어야 할까요, 예배당이어야 할까요? 예배당은 말 그대로 예배드리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단지 건물인 예배당보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지을 때 교인들의 마음이 더 기꺼이 열리고 지갑도 따라서 열리지 않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다윗이 가졌던 죄책감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앞서 인용했던 삼하 7장을 보십시오. 
(삼하 7: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삼하 7: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예배당건축이 아니라 성전건축이 되면 하나님의 집은 이렇게 형편없는데 나만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사는구나, 하는 다윗이 가졌던 죄책감을 성도들에게도 갖도록 만들기가 쉽습니다. 
예배당을 성전으로 보지 않는다는 신약의 가르침은 둘째 치더라도 이런 이해는 많은 부작용을 낳습니다. 예배당 건축은 필요합니다. 교인들의 헌금도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딱 그만큼만 필요합니다. 예배당이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건축하면 되고 이를 위해 헌금이 필요하면 교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헌금하면 됩니다. 예배당에 거룩함을 부여해서 필요 이상으로 거대하고 화려하게 만들기 원하거나 교인들을 힘에 부치도록 헌금을 하도록 만들고자 한다면 이것은 교인들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어차피 건축은 해야하고 그렇게 좀 더 헌금을 독려하게 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됩니까? 술, 담배하고 헛된 데 쓰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당장은 아무 문제도 없는 듯 보이지만 진실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행동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 써야할 교회의 에너지를 건물에 낭비하게 되고 교회의 진정한 성장, 선교에 방해가 되며 교회는 서서이 병들게 됩니다. 
 
교인들을 교회에 가두려고
둘째로 예배당을 성전으로 부르려하는 이유는 교인들을 교회 중심의 신앙인으로 묶어두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당이 하나님의 집인 성전으로 이해되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이 예배당으로 나와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여기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 성전이니까요. 이런 이해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은 곧 교회의 일이라는 등식으로 발전합니다. 교회의 봉사만이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이런 이해까지 이르면 신앙적 열정이 뜨거워지면 질수록 그 삶이 점점 교회 안으로 들어오다가 급기야는 교회에 갇히게 됩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현상을 적극적으로 부추깁니다. 한국교회에서 목회의 성공의 가장 중요한 척도는 큰 예배당과 더불어 많은 교인입니다. 교인들이 더 많이 교회에 오고 교회 일을 더 열심히 하고 더 많이 전도할수록 그 목사는 교회를 잘 성장시키는 훌륭한 목사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성공했습니다. 지난 세기 한국교회는 교회사에 유래가 없는 속도로 성장하여서 전국민의 20%에 이르는 규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 3.1절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식민지 시절 기독교인은 전국민의 1.5%에 불과해도 국가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지도적 역할을 하며 존경을 받았는데 오늘날에는 20%에 이르는데도 동네북처럼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왜 일까요? 예배당을 성전으로 이해하고 교회일을 하나님 일로 이해하는 동안 교인들의 생각과 역량이 교회 안에 모두 갇혀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교회에 갇힌 신앙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중심의 신앙은 건강한 것입니다. 교회에 갇힌 신앙은 병든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는 이미 하나님이 결코 교회 안에 갇힐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행 7: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행 7: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행 7: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행 7: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 설교에서 인용한 구절은 구약 시편입니다. 
(사 66: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 갇혀 사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도의 삶은 교회 안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 끝까지 흩어지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나면 그 뜨거운 사랑 때문에 교회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황홀한 변화산에 머무르려한 세 제자를 데리고 마을로 내려오시고, 갈릴리에 머무르려 하는 열두 제자를 땅 끝까지 파송하신 것처럼 사명을 깨닫는 성숙한 제자가 되면 가정과 일터와 지역사회와 선교지로 흩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일상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교회를 성전으로 부르는 데는 교인들의 욕망도 숨어 있습니다. 예배당이 성전이 되고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나간다고 생각하면 성전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하나님과도 잠시 이별하게 됩니다. 그 말은 곧 교회가 아닌 곳에서는 하나님을 잊고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아시고 동행하신다는 말이 은혜요, 감격인 이들도 있지만 짐이요, 부담인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성전에만 거하신다는 생각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모습과 집과 일터에서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기독교인이 출현합니다. 교회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을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할 일을 사람들 앞에서는 하는 교인들이 출현합니다. 이는 예배당을 성전으로 왜곡하고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려는 시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일상에 임재하시는 분이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진짜 기독교인의 봉사입니다.
2011년 행일미디어라는 회사를 창업한 백승주 대표의 인터뷰가 한 기독교언론에 실렸습니다. 그는 창업 전에 기독교기업을 표방하는 회사를 두 곳이나 다녔습니다. 그 회사들의 대표는 자신이 교회 중직자임을 밝히고 직원들을 전도하려 애쓰고 정기적으로 목사를 불러서 전 사원이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거기에 매력을 느껴 입사했는데 막상 회사를 다녀보니 그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수당도 안 주고 야근을 강요하고 임금을 체불하고 비정규직 대량해고로 지탄을 받고 직원의 임금은 안 오르는데 직원들과 비교할 수 없이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장의 연봉은 계속 오르기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때문에 비기독교인 직원들이 기독교인이 되기는커녕 이미 기독교인 직원조차도 신앙을 버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큰 회의를 느꼈습니다. 뜻이 맞는 직원들과 제대로 된 기독교기업을 만들어보자고 퇴사하여 지금의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적 회사란 직원들에게 예배를 강요하는 회사가 아니라 직원들을 행복하게 하는 회사라고 믿었습니다. 이를 위해 전 직원에게 지분을 나누고 경영에 참여시켜 의사결정 뿐 아니라 이익배당도 함께 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을 비롯한 전 직원의 연봉을 공개하고 대표와 직원의 연봉차가 최대한 줄여서 직원들에게 좀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직원들에게 일을 더 시키기보다 복지를 더 많이 누리고 회사에서 더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복지제도와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직원들은 회사의 성장에 따라 자신들의 임금 뿐 아니라 배당금이 늘어나고 회사의 각종 복지제도를 통해 안전하고 여유로운 삶을 누리다보니 이 회사의 성장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 믿고 사장이 감시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회사는 매년 30% 씩 영업이익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에 충만한 분이십니다. 기독교인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당을 성전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날의 성전은 어디일까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