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3:16-17/성전으로 살기

190317 주일설교 성전3
포르노중독
20권 이상의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목사인 존 비비어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를 자신도 겪었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바로 Pornography addiction 즉 포르노중독입니다. 그는 11살 때부터 포르노를 접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자신이 중독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가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이제는 해방이라고 생각했지만 중독은 오히려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는 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면 되리라 생각하고 헌신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 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독교 사역자를 만나 그에게 문제를 고백하고 안수기도를 받았는데도 여전히 같은 상태였습니다. 괴로워하던 그는 1986년 5월 2일 4일 작정을 하고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4일 째 금식기도를 하던 날 그는 마침내 자신이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날 이후 포르노를 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자신이 왜 그 이전에는 그렇게 원하고 기도했는데도 실패했고 왜 그 금식기도에서는 성공할 수 있었는지 하나님께 묻고 묵상하였습니다. 주님이 그의 마음 속에 깨닫게 해 주시기를, 그 이전에 그의 염려는 포르노중독이 그의 삶과 사역에 기칠 영향을 걱정했다면 그 날 그의 기도는 온전히 하나님을 슬플게 만드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 이전에 그의 근심과 기도는 세상의 것을 잃을까 하는 것이었다면 해방된 날은 하나님의 영광을 염려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원리를 사울과 다윗의 예에서도 찾습니다. 두 사람 모두 큰 죄를 범했지만 사울은 책망받은 후에도 여전히 백성들 앞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걱정했고 다윗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묻습니다. 성인포르노는 많은 나라에서 합법적인 영상물입니다. 그런데 왜 존 비비어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성전된 성도
오늘은 성전을 주제로 한 마지막 설교입니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더 이상 건물이 성전이 아님과 하나님이 그 안에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성전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이는 그 어느 곳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 혁명적인 깨달음에 더해 오늘 본문은 또 하나의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선언해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까지도 성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즉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메시지를 처음 들었던 이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에게 성전은 거룩한 산 시온,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건물이었고 그 곳은 아무나 접근하지 못 하는 신성함이 깃든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자신들은 늘 성전 뜰이라도 한 번 밟아볼라치면 정결예식이라도 거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 하는 부정한 존재였습니다. 감히 성전 운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이제는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셔서 그 분이 살아 움직이는 성전이 되었다는 메시지가 선포되었을 때만 해도 혁명적인 생각의 전환이지만 그래도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지는 아니었을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리스도인들이 곧 이 편지를 받아보는 고린도 교인 너희들이, 또 이 천년이 지나 이 편지를 읽게 될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있음으로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뭐, 니가? 내가? 이렇게 형편없는 짓을 곧잘 하고 온갖 병과 장애를 가지고 있고 생각하는 바가 온통 못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요즘 표현대로 하자면 이건 아니지~라고 할 법한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성전, 거룩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전으로 삼겠다는 것은 그러나 하나님의 아주 오래된 프로젝트였습니다. 진작에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바를 들어보십시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그리고 이 예언을 오순절에 교회에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이루셨습니다.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하나님의 이 프로젝트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신약시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자신들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집,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겉모습이 어떠하든, 우리의 출신이 어떠하든, 우리의 인종이나 나이나 성별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신성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거룩한 곳 성전
그럼 이 진리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가 무엇입니까? 성전이란 곳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은 거룩한 곳이므로 더렵혀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은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성전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그 이름에 걸맞게 깨끗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앞서 존 비비어가 포르노중독과 힘겹게 싸웠던 이유입니다. 포르노그라피를 성전에 걸 수 있습니까? 그랬다가는 구약시대에는 바로 죽음을 당했습니다. 포르노그라피는 하나님 앞은커녕 부모님 앞에서라도 내어걸 수 있을까요? 성전에 걸 수 없다면 성전된 우리 삶에서 내어버려야 합니다. 성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성전에 갖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우리 삶에도 들여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곧 음란이며 탐욕이며 허영이며 우상숭배이며 모든 종류의 중독입니다. 우리 삶을 더럽히는 모든 우상숭배를 내어버리고 깨끗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냐는 것입니다. 일꾼모임에서 이 본문을 공부할 때 한 분이 질문하시기를, ‘성전이라고 불릴만큼 깨끗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라고 하셨는데 많은 일꾼들이 이 질문에 공감했습니다. 거룩하게 살기 싫어하는 기독교인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거룩하게 사는 것이 어려워서 그렇게 못 사는 것이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전으로 살기가 어려우니 체념하고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사는 것일 답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전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전으로 살기
첫째는 포기하지만 않으면 많은 것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청소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집안을 아무리 깨끗히 청소해도 아이가 있는 집은 하루도 지나지않아 지저분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봐야 다시 어지러워지니 청소를 멈춰버릴까요? 그러면 얼마 지나지않아 집이 아니라 쓰레기장이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다시 지저분해지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우리는 청소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집이 항상 어느 수준 이상으로 정돈되어 있고 사람이 살만한 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샤워해 봐야 하루만 지나면 또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될테니 뭣하러 씻나요,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제 삶의 철학입니다, 라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 분 있으십니가? 밥 먹어봐야 어차피 배고파질테니 안 먹고 죽을래요와 뭐가 다를까요? 열심히 살아봐야 언젠가는 죽을테니 뭣하러 아둥바둥 사나요와 뭐가 다를까요? 
거룩하게 살려는 노력도 쉽지않지만 포기해 버리면 우리는 성전이 아니라 오물통 같은 인생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 내면이 온통 악취나는 고름과 오물과 배설물과 꾸정물과 썩어가는 주검으로 가득한 채 살아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어떻게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될 수 있을까요? 
둘째는 포기하지 않아야 많은 것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거룩을 위한 영적 싸움을 계속 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내이고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아들이자 딸이고 친구이자 교우이자 동료입니다.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이 많고 그 중에는 롤모델로 삼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을 위한 싸움을 쉬지 않을 때 우리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배우고 존경합니다. 배우자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사랑합니다. 참 부부사랑은 신뢰없이 불가능합니다. 동료들과 교우들이 우리를 의지하고 배우고자 합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할 때 우리를 찾아오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성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존 비비어의 경우도 힘겨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기에 마침내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요일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성전으로 만드시는 이 하나님의 성령이 세상보다 크신 분이므로 그 분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는 마침내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는 싸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이기기로 예정된 싸움을 우리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포기해버린다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요? 
담배를 끊은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렇게 달고 맛있던 담배가 어느 날 갑자기 쓰고 역겨워서 더 이상 물고 있을 수도 없고 입에 대고 싶지도 않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존 비비어도 그렇게 자신을 유혹했던 포르노그라피가 어느 날 갑자기 역겨워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욕구가 바뀐 것입니다. 욕구가 바뀌었다는 말은 우리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호랑이일 때는 고기밖에 못 먹지만 사슴이 되면 풀밖에 못 먹습니다. 호랑이에게 풀을 먹으로라는 것도 고문이지만 사슴에게 고기를 먹으라는 것도 고문이지요. 호랑이일 때는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애써봐야 소용없습니다. 불가능한 싸움입니다. 사슴이 되어버리면 고기를 먹을 필요도 없고 먹고 싶지도 않고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지 않으려면 사슴이 되면 됩니다. 우리의 본질이 바뀌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십니다.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성령으로 거듭나면 즉 다시 태어나면 더 이상 육으로 살 때 갈망하던 것을 갈망하지 않게 됩니다. 영으로 육과 다른 욕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육의 욕망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런 거듭남의 산파 역할을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해 주십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거룩한 싸움을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고 포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령님을 모시고 성전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