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9:1-8/추락의 이유

190324 주일설교
우울증
기독교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책으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가 있습니다. 18세기 중반 식민지 개척 시기 스코틀랜드에서 이 곳 뉴저지와 펜실베니아로 건너와 탄압받던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을 섬기고 선교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목사의 일기입니다. 이 영적 거장의 일기는 하루 종일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 잃은 영혼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내면의 연약함, 사역의 어려움 등으로 숱하게 낙심하고 좌절한 기록을 남겨주기도 합니다. 한 대목을 들어보십시오. 
(1743년 5월 18일) 이 황무지에서 사는 것은 정말 외롭다. 영어로 대화할 사람은 한 명 뿐이다. 친구도 없다. 내 식사는 옥수수죽이거나 삶은 옥수수 뿐이다. 내 침대는 짚더미이다. 사역은 열매가 없다… 이 불쌍한 인디언들은 그들의 땅을 독일인들에게 빼앗기고 비참하게 산다… 무엇보다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그 얼굴을 감추고 계시다는 점이다. 
(4월 7일) 나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고 연약하고 의지력도 없고 무가치하여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인디언 선교를 절대로 성공하지 못 할 것이다. 이런 생활에 진력이 난다. 차라리 죽는 게 훨씬 속이 편할 것 같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경건한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아, 내 차례는 언제나 오려나… 수 년 내에 와야 할 텐데…
제가 볼 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이 순간 분명 우울증을 겪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우울증을 겪는다는 말입니까?’ 네, 영혼의 감기라는 우울증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병이고 신앙인도 예외가 아닙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뿐 아니라 존 칼빈, 존 웨슬리, 찰스 스펄전 같은 설교자들도 크고 작은 우울증을 겪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인데 모세, 다윗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엘리야가 그러합니다. 
 
추락
오랜만에 엘리야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작년 말에 살펴보았던 왕상 18장에서 엘리야는 참으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우상숭배를 일삼는 아합왕과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항하여 갈멜산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19장에서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보잘 것 없습니다. 아합왕으로 이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왕비 이세벨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자 엘리야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갑니다. 3-4절입니다. 
(왕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브엘세바는 이스라엘 땅의 최남단 마을입니다. 여기를 넘어서면 이스라엘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환 즉 종은 사역을 돕는 도우미입니다. 그를 브엘세바 땅에 남겨두고 거기를 떠나 더 남쪽 광야로 하룻길을 갔다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 땅과 그 백성들과 그들을 위한 사역을 모두 내려놓고 떠나버렸다는 말입니다. 목숨을 건지겠다고 사명을 포기한 것입니다. 얼마나 낙심하고 지쳤던지 광야에서 그늘을 만들어주는 유일한 존재인 로뎀나무 덤불 아래에 앉아서 죽는 것이 낫겠다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토록 위대했던 선지자는 왜 이렇게 초라하게 추락하고 말았을까요?
 
실망
표면적인 이유는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수고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호렙산으로 이동한 엘리야와 하나님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왕상 19:9) …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호와의 말씀은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네가 왜 이스라엘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여기 이집트 남의 나라 땅에 와 있느냐는 말입니다.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왕상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내가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웠고 갈멜산의 대결도 이겨서 이스라엘이 회개할 줄 알았는데 이세벨의 세력은 그대로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합니다. 즉 내가 고생한 게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정말 낙심합니다. 밤잠 안 자고 일군 비지니스가 무너질 때 세상이 무너진 것 같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나를 실망시킬 때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충성을 다해 섬긴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믿었던 교우에게 배신을 당했다 생각할 때 믿음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우울증에 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만 거기에는 눈에 보이는 이유 외에도 영적 이유도 있습니다. 
 
시선
그 첫째는 시선입니다. 보는 곳이지요. 먼저 엘리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십시오. 
(왕상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 오직 나만 남았거늘 …
엘리야의 시선은 그 자신에게 향해 있습니다. 갈멜산 대결을 비롯해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게 한 원동력으로 자신의 열심을 꼽습니다. 의인으로는 자신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분명 하나님을 바라보고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오해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주 겪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과 재능과  성공과 복을 어느 순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자신만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실패가 와도 버틸 수 있는데 자신을 바라보면 버티지 못 합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많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물 위를 걸은 사람입니다. 그 비밀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도 시선을 예수님에게 바람과 파도에게로 돌리자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마 14:29) (주께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스트레스와 실망과 고난이 우리의 영혼을 때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그 충격을 딛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반면 시선을 돌려서 자신과 파도와 세상을 바라보면 우울의 파도에 휩쓸려 저 깊은 낙심의 바다에 가라앉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성도라면 다시 시선을 주님께 돌리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역시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의 일기를 다시 보십시오. 
(1743년 8월 4일) 하루 종일 기도하며 지냈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마다 새로운 열정이 솟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기도와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기도하면 할수록 기도가 즐거워진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평화롭게 자고 일어날 수 있는 길이다. 
 
생명
성도를 우울증에 빠뜨리는 두 번째 이유는 생명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이 짧은 이야기에서 생명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살펴보십시오. 
(왕상 19:2) 이세벨이 … 이르되 ‘내가 …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왕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 (왕상 19:4) …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위협에 목숨을 건지고자 도망칩니다만 지치고 낙심한 나머지 자기가 죽겠다고 나섭니다. 왜 이스라엘에 있지 않고 남의 나라에 와있느냐는 여호와의 책망에도 그는 계속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왕상 19:10)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왕상 19:14)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
그토록 담대했던 선지자도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기 시작하니 그저 두려워 떨고 도망치고 원망만 쏟아놓는 불쌍한 노인네가 되고 맙니다. 순교자와 배교자자의 차이는 사실 종이 한 장입니다. 그 한 장의 종이는 생명을 버리느냐, 못 버리느냐입니다. 생명을 기꺼이 내어버리고 나면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생명을 못 버리면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설은 생명을 버리는 이는 생명을 얻지만 생명을 못 버리는 이는 생명을 잃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이들은 이 진리를 믿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목숨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눅 12: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생명을 그리스도 앞에 내어놓은 사람은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를 따를 자유를 얻고 마침내 그 생명을 얻게 됩니다. 생명을 내어놓지 못 하고 쥐고 있는 사람은 무거운 염려의 족쇄에 묶여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 하고 결국은 그리스도와 생명을 모두 잃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담대함
1521년 1월 3일 교황청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파문하고 독일 의회에 그를 사형시키도록 압력을 넣습니다. 4월 17일 교황청은 보름스의회 법정에 출두하여 심문을 받으라고 루터를 소환합니다. 이런 이런 식으로 종교개혁자 후스를 소환하여 화형시킨 전력이 있는 교황청이었기에 친구들은 루터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을 합니다. 4월 16일 아침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마차에서 내려 보름스의회장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재판관과 심문관들 앞에서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경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황권의 부패와 잘못은 분명합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에게 사로잡혀 있어서 어떤 것도 철회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세벨은 늘 우리를 위협합니다. 가정을 위협하고 일터를 뒤흔들고 건강과 자녀들을 공격합니다. 세상은 늘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수고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 하고 진심이 오해를 받고 사람들은 우리를 배신합니다. 그런 일을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일을 겪고 상처입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목숨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금방 일어서서 다시 전진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세상에 시선을 두고 목숨을 위해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은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목숨까지 다 내어 드려서 당신을 위협하는 이세벨마저 물리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