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9:9-18/열심을 내려놓기

190407 주일설교 엘리야13
열심
대학시절 기독학생회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한번은 통일교가 학교회관에서 행사를 연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요즘은 신천지라는 이단이 교회마다 문제를 일으키지만 당시에는 통일교 이단이 대학캠퍼스마다 취미동아리를 가장하여 침투하는 것으로 알려져 문제를 일으키던 시절이었습니다. 선배들이 대책회의를 열고 결론을 내리기를 학교회관 입구를 점거하여 통일교 행사가 진행되지 못 하도록 방해를 하기로 했습니다. 당일 아침 찬양팀이 기타 몇 대를 메고 20여 명의 기독학생회 회원들이 회관 입구를 둘러싸고는 찬양을 크게 부르고 중간중간 통일교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으려니 통일교도들이 나와서 소리를 지르는 통에 교문 옆에 있는 학생회관 앞은 몹시 소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침에 등교하던 다른 학생들이 이 소란을 보면서 인상을 쓰고 비난을 하는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저렇게 시끄러워. 왜 자기들끼리 저렇게 싸우는지…’ 그 순간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우리야 분명 이단을 막는다는 명분과 열정으로 나섰지만 비기독교인들의 눈에는 다 교회라고 하니 정통인지 이단인지 알게 뭡니까,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으로만 보이지. 그리고 법치국가에서 이런 우격다짐으로 행사 하나를 방해한다고 과연 통일교 전파를 막을 수 있을까 그 효과도 의심스러웠습니다.
신앙의 열심은 분명 귀한 것이지만 때로는 그 열심이 열매를 맺기보다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교회의 갈등은 대부분 열심있는 신앙인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차라리 열심이 내지 않으면 좋으련만 하는 안타까움이 들 때도 한두 번이 아니지요. 열심을 내는데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호렙산에서 벌어지는 여호와와 엘리야의 대화입니다.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도 끄떡없는 이세벨의 세력 앞에 절망한 엘리야는 몸과 마음이 모두 탈진한 채 광야로 들어가 죽기를 구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천사를 통해 먹이고 회복시켜 호렙산으로 보내십니다. 호렙산의 한 굴에 들어가 머무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맡긴 사명은 어떻게 하고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에 대해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왕상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두 번이나 같은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는데요. 여호와의 질문이 엘리야를 책망한다면 엘리야의 대답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왜 사명을 저버리고 여기 있느냐고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명을 감당했습니까?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이런 상황에서 나 혼자 이 무거운 책임을 다 지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합니까?’ 엘리야의 이 원망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하나씩 답을 주십니다. 
 
누구의 열심인가
먼저 자신의 열심을 내세우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왕상 19: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여호와께서 당신을 엘리야에게 나타내보이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보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떤 하나님을 기대했을까요? 그의 말처럼 엘리야는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의 열심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기대하기에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시려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중에 나타나시는 것이 옳습니다. 혹은 대지를 뒤흔드는 지진 중에 나타나시는 것도 옳습니다. 혹은 뜨거운 불덩어리로 나타나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이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불로 임하신 하나님과도 뜨겁고 격정적인 그의 기질, 그의 열심과도 어울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바람 속에도, 지진 중에도 그리고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다리는 여호와는 어디에서 나타나십니까? 
(왕상 19:12) …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세미한 소리는 아주 조용하고 부드럽고 인격적입니다. 엘리야의 열정과 열심과 격정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시방식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바람과 지진과 불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너의 그 열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열심이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명을 종종 망치곤 합니다. 그러면 일을 이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선배 엘리야가 모르던 것을 깨닫고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이루는 것도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성도는 그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건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까? 이 말의 의미는 우리 마음과 생각과 눈에서 힘을 빼라는 것입니다. 
제가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몸이 자꾸 가라앉고 물을 먹으니 더 힘을 주어 팔다리를 젖고 몸을 물 위로 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자 코치가 소리치기를 ‘고개 들지 마세요.’하는 겁니다. ‘아니, 머리를 안 들면 가라앉고 물 먹잖아요.’ ‘아닙니다. 머리를 들면 더 가라앉습니다. 머리를 편안히 떨어뜨리고 몸을 힘을 빼세요. 팔다리에도 힘을 빼세요. 편안히 배운대로 저으세요. 그러면 물이 당신 몸을 떠올려줍니다.’ 몸에 힘을 빼는 것을 배우고 나니 수영은 다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다음은 식은 죽먹기였지요.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힘을 빼야 합니다. 나의 열심이 일을 이룬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으면 생각에서 교만이 빠지면 마음에서 원망이 빠지고 눈에서 살기가 빠집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우리 몸을 성령께서 띄워주십니다. 성도는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 성령의 바람을 타고 밀려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는 편안합니다. 부드럽습니다. 태풍처럼 소리치고 지진처럼 밀어부치고 불처럼 펄펄 끓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만 속삭여도 권위와 영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고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힘을 빼면 우리 삶도 편안합니다. 내가 아니면 이 집이 망하고 교회가 큰일나고 비지니스가 안 될 것 같아서 잠 못 이루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관계가 깨지고 사람들과 멀어지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열심히 하는데 성과는 안 나고 패배감만 자꾸 더 깊어지지 않는지요? 우리의 열심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몸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가라앉는 겁니다. 힘을 빼야 떠오릅니다. 힘을 빼면 앞으로 나갑니다. 힘을 빼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을 움직이는 것은 여러분의 열심입니까, 여호와의 열심입니까? 일을 이루시는 여호와께서 일하시도록 몸과 마음에 힘을 빼고 맡겨드리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과연 실패인가
엘리야의 대답은 두 번째로 이 모든 일이 허사였다는 원망입니다. 목숨 걸고 싸웠는데 불의는 무너질 줄 모르니 헛일을 했다는 원망이지요.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왕상 19:10) 그가 대답하되 ‘…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
저 아합과 이세벨과 불의한 세력은 도무지 무너질 줄 모릅니다. 제가 목숨 걸고 싸운 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불의와 싸우는 의인들이라면 누구나 낙심할 만한 상황입니다. 주님, 상황이 이런데도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주님은 하실 말씀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15-16절입니다. 
(왕상 19: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왕상 19: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새 아람왕과 새 이스라엘왕과 새 선지자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그 세 사람의 역할은 뭘까요? 바로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고 이스라엘을 병들게 하고 있는 저 불의한 세력을 무너뜨리는 심판의 도구입니다. 17절입니다. 
(왕상 19: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실제로 약 20년 후 하사엘과 싸우다 부상당하고 도망친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 요람을 예후가 죽이고 이세벨 일당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엘리야는 지금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않은 저 기세등등한 불의 앞에서 좌절하지만 하나님은 그 불의를 무너뜨릴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계셨고 마침내 그들을 무너뜨리고야 마십니다. 
우리는 늘 눈 앞의 현실만 보고 좌절하지만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모두 함께 보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 미래의 영광스러운 승리까지 보게 해 주십니다. 이게 바로 비전입니다. 우리는 못보지만 하나님은 보고계시는 미래를 보는 것, 이 미래를 보는 이는 비전을 갖게 되고 용기를 회복합니다. 여러분의 자녀 때문에, 가정문제로, 교회와 일터로 인해 좌절이 되십니까? 지금 이 현실 너머에 있는 미래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복과 승리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요? 금방입니다. 10년 전, 20년 전에는 까마득했던 미래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입니다. 눈 깜빡할 새 오지 않았습니까? 10년, 20년 후 금방 옵니다. 그 미래가 승리와 축복의 순간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믿고 다시금 용기를 내십시오. 의를 위하여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미래는 멀지 않았습니다. 내 방식대로 되지 않아도, 내 세대에 다 이루지 못 해도, 지금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미래를 믿고 비전을 가지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당신 혼자인가
엘리야의 마지막 대답은 자신 혼자 이 모든 짐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퍼맨 컴플렉스의 전형입니다. 10절입니다.
(왕상 19:10) 그가 대답하되 ‘…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자신만 남았고 홀로 이 무거운 짐을 다 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무엇이라 답하십니까?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너 혼자 남았다고 착각하지 마라. 이 이스라엘에는 저 불의와 싸우는 의인이 7천 명이나 있다. 네, 7천 명이요? 엘리야의 눈에는 자기 하나 밖에 안 보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곳곳에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여 불의와 싸우는 의인이 7천 명이나 남겨 두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이 대답을 듣고 용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제자로 삼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는 불의, 이기기 힘든 죄, 감당하기 힘든 사명을 붙들고 싸울 때 우리가 종종 하는 착각이 이 힘겨운 싸움을 나 홀로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착각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이 나 혼자인 것도 아니고 나 홀로 세상을 책임질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정직하게 산다고 나 혼자 손해 봐. 그렇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의인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선교하느라 나 혼자 고생하나?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오지를 가도 비지니스맨도 안 들어가는 곳에도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선교사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나 혼자 속 상하고 답답한 것 같지만 눈물 흘리며 교회를 위해 중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의 기도와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을 여전히 행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는 동역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과 연합하여 함께 기도하고 섬기는 것은 성도들에게 힘이 됩니다.
고개를 돌려 보십시오. 하나님이 남겨두신 칠천 인이 보이시나요?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칠천 인의 동역자들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역자들과 함께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