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32-38/저희를 사하소서

190414 종려주일설교
무죄한 자
최근 한국에서 산체스와 마이크로닷이라는 힙합가수 형제의 가족사건이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여러 방송에 출연하여 인기가 급상승하던 중 이들의 부모가 21년 전인 1998년 충북 제천의 한 낙농가 마을사람들에게 사기를 쳐서 현재 가치로 거의 200억에 달하는 돈을 가지고 뉴질랜드로 도주한 사기범이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의 뉴질랜드 집이 25억이 넘는 호화주택이며 지금까지 사기친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해온 반면 당시에 사기를 당한 낙농가 주민들이 부도를 맞고 채무에 시달리거나 신용불량자나 암투병을 하는 등 지금까지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더 큰 비난이 일었습니다. 이들 형제는 당시 자신들은 5살 정도의 아이여서 부모의 사기행각에 대해 전혀 몰랐으며 당연히 사기에 가담하지도 않았으니 책임이 없다는 태도를 취해 공분을 샀습니다. 당연히 현행법으로는 이들 형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그들이 뉴질랜드에서 누린 호화로운 삶과 학비와 음악공부, 연예계에 진출하여 큰 돈을 벌게 될 때까지 들어간 투자비용 등이 모두 그들 부모의 사기로 얻은 돈이니 과연 그들은 몰랐으니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그 사기의 피해를 당해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잃고 길거리에 나앉아 비참한 생활을 하고 부모님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여러분의 자녀들은 학비가 없어 공부할 기회를 잃고 부모의 채무를 물려받아 신용불량자로 암투병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과연 그 형제에게 당신들은 부모의 죄를 몰랐으니 정녕 무죄합니다라고 선언해 줄 수 있을까요?
 
종려주일
오늘은 교회력에서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맞이한 것을 기념하여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내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겪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오늘 주일설교부터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는 7일 동안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 소위 가상칠언을 하루에 하나씩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번 째 말씀입니다. 
(눅 23: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첫 말씀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당신의 기도처럼 자신들이 하는 짓이 죄인줄도 모르고 저지르는 무지하는 이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우리는 죄인줄도 모른 채 죄를 먹고 마시며 삽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죄없는 선민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추상같은 음성으로 외치십니다. 
(요 8:21)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 무지하고 순진하고 순수할 수 있지만 죄 없을 수는 없는 것인 인간입니다. 
 
죄없다 하는 시대
오늘날 이 시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죄 없다 하는 시대’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학문분야인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신을 다음 세대에 퍼뜨리고자 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결합체일 뿐입니다. 즉 종족번식의 ‘맹목적 목적’ 외에는 어떤 본질적 목적도 없이 존재하게 된 우연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유전자의 보존, 번식이라는 목적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들은 왜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하려하고 심지어 성폭력까지도 서슴지 않을까요? 진화의 과정에서 생존, 번식의 확율을 높이려면 최대한 유전자를 많이 퍼뜨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제국주의 국가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착취를 서슴지 않을까요? 최대한 많은 자원을 소유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종족을 억압하는 것이 우리 종족의 번성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도덕과 윤리의 근거를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생존과 번성을 위해 존재하는 우연적 존재에 무슨 도덕이 있으며 윤리가 있습니까? 거기에는 얼마나 더 유리하냐, 불리하냐의 문제 밖에는 없습니다. 고양이가 밥상의 생선을 먹으면 소리를 질러 쫓을 수는 있어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이 양심도 없는 고양이야, 네가 어떻게 주인의 밥상에 오를 생각을 감히 하냐?’ 고양이에게 양심을 찾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사람을 물어죽인 맹견을 도살하는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이지, 비윤리적인 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개에게 무슨 윤리가 존재합니까? 
도덕과 윤리의 기초가 사라지면 죄를 더 이상 죄라고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이 시대는 죄를 신경증으로 바꿔부르고 진화과정에서 습득된 생존양식으로 바꿔부릅니다. 그 결과 인간의 삶은 개와 고양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 되고야 맙니다. 그러나 이런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죄는 실제하고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살인자에게 아들을 잃은 부모에게 약육강식의 진화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을 겪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이해시킬 수 있습니까? 성범죄자에게 딸이 유린당한 부모에게 진화과정에서 종족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된 결과이니 담담이 받아들이라고 할 수 있나요? 조국을 빼앗기고 가족과 땅과 자원을 빼앗긴 약소민족에게 어느 민족이든 더 번성하기 위해 다른 민족을 침략하기 마련이고 자연의 섭리이니 저항하지 말라고 하면 이해가 되나요?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부당하다는 느낌은 어겨서는 안 되는 윤리와 도덕이 있다는 믿음에 근거합니다. 
부당하다는 느낌은 진화과정에서 얻은 생존에 유리한 생존방식이 아니라 신이 부여한 도덕율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도덕율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친구를 때리면 안 되고 남의 것을 집어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도덕율을 어겼을 때 그것을 죄라고 느끼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또 우리는 실재하는 죄의 결과로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음주운전자의 차에 치어 사랑하는 이를 잃고 사기꾼에게 평생 모은 재산을 빼앗기고 마약판매상들에게 아들이 유혹당할까봐, 불량한 이들에게 딸이 유혹당할까봐 염려하고 총을 든 강도들이 스토어에 뛰어들어올까봐 걱정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실재하는 죄 속에서 살아가며 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습니다. 
 
죄의 구조
여기 성실하고 정직한 용접기술자가 있습니다. 그는 출퇴근시간도 어기지 않고 상사가 주는 업무를 성실하게 감당하여 번 돈을 잘 저축하여 가족을 부양합니다.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해본 적도 없고 거짓말로 상사나 고객을 속여본 적도 없습니다. 어느 날 그가 용접하여 객실을 증축한 낯익은 배가 TV에 나왔습니다. 온 국민과 그 부모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바라보는 동안 그 배가 가라앉았고 299명의 아이들과 승객들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뉴스에서는 침몰원인을 불법설계변경으로 객실을 증축하여 배의 무게중심이 높아진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객실증축허가를 받았는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던 이 용접기술자는 과연 이 배의 침몰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아니면 그 역시 책임의 일부를 나누어 져야 할까요? 
광고회사의 뛰어난 카피라이터가 있습니다. 그의 카피를 뽑는 감각은 업계에서도 정평이 나있고 그 역시 직업인으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회사로부터 새로 출시하는 가습기살균제 카피를 계약하고 여느 때처럼 그의 카피는 소비자들의 구매의욕을 높여주어 성공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얼마 후 그 가습기 살균제가 1,30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6,000명의 삶을 평생 고칠 수 없는 장애를 안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다섯 살도 안 된 아이가 그 회사의 광고만 믿고 아이에게 쾌적한 잠자리를 마련해주려 가습기 살균제를 사온 아버지의 선택에 의해 신장과 내장이 다 망가져서 온 몸의 튜브를 꽂고 평생 침대에 누워살아야 합니다. 자, 이 카피라이터는 그 가습기살균제를 만든 사람도 아니고 그저 주문받은 대로 광고카피를 만들어준 것 뿐이니 죄가 없을까요, 아니면 그에게도 죄가 있을까요?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입대하여 누구보다 충성되게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 있습니다. 공산군이 남하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지휘관을 말을 듣고 투입되어 누구보다 열심히 진압하고 총격전까지 치렀는데 알고보니 그들이 선량한 시민이었습니다. 나라를 이끄는 책임감있고 희생적인 위정자들을 존경하고 충성스럽게 따랐는데 알고보니 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국민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고 자신의 사욕을 채운 탐욕스러운 이들이었습니다. 이 착하고 순진하고 충성스러운 군인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굴의 의지로 공부하고 일하고 저축하고 투자해서 마침내 견실한 기업을 일구어 땀의 대가로 자수성가한 기업인이 있습니다. 그는 땀의 가치를 믿고 정직과 성실은 결실을 거둔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하면 된다는 나이키 광고문구같은 신념을 심어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리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성공은 이 나라가 중동의 석유자원을 싸고 안정적으로 사오는 것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정치, 경제적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매년 천 조원이 넘는 국방예산을 투입하여 육성한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을, 그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제 3세계의 수많은 민중들은 그보다 더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흘려 일해도 그가 누리는 부의 억만 분의 일도 누리지 못 한다는 것을, 애초에 이 나라가 인종청소에 준하는 수준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결코 누리지 못 했을 성공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가 누리는 부는 정말 그의 순수한 노력의 대가일까요, 아니면 제국의 폭력과 착취의 열매를 나누어 가지는 것일까요? 그는 정말 정직하고 성실하기에 아무런 죄도 없다고 하겠습니까? 
예, 우리는 정직할 수도 있고 성실할 수도 있고 마음이 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폭력과 착취의 죄가 구조화되어 있는 이상 그리고 우리가 그 구조 속에서 사는 이상 아무도 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웃들이 폭력과 착취의 희생자가 되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인식하기에는 너무 무지하고 순진한 것이 혹은 그런 현실을 못 본척 하는 것이 어쩌면 더욱 큰 죄가 아닐까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긴다 믿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들이 메시야를 죽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지 못 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죄와 악에 일조하고 그 악한 열매를 따먹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죄없다 하는 믿어온 우리는 정말 죄없는 이들일까요?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구원은 우리가 죄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님을 못 박은 자리에 서있는 우리를 위해 드리시는 주님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눅 23:34)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