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3:35-43/낙원에 있으리라-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

190415 고난주간특새 가상칠언2
신성모독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두 번째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마도’ 좌편 강도의 음성으로 대표되는 비방입니다. 39절입니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는 앞문맥인 35-37절에 등장하는 관리들과 군인들과 같은 목소리로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합니다. 35절의 관리는 비웃었고 36절의 군인들은 희롱하고 39절의 행악자는 비방하는데 그 내용은 비슷합니다. ‘네가 그리스도/유대인의 왕이면 먼저 너를 구원하고 다음으로 우리도 구원하라.’ 이들의 두 가지 요구는 십자가를 대하는 불신앙이 낼 수밖에 없는 목소리입니다. 이 요구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요구입니다. 
계몽주의와 자유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시절 소위 무신론 전도사들이 기독교 마을들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이 살아있다면 내가 한 시간 동안 그를 저주하는 동안 나를 심판해 보라고 해라. 한 시간이 지나도록 내가 그를 저주하는데도 나에게 아무 심판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살아있는 신이 아니다.’ 사실상 그는 하나님에게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저주하고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이 허구하라는 것을 밝힐텐데 당신이 살아있다면 나타나서 증명해 보이고 이들이 당신을 버리는 것을 막아보라 즉 당신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요구를 이 시대의 무신론자들도 여전히 던지고 있습니다. 
한편 이 시대는 하나님에게 우리도 구원하라고 요구합니다.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픈데, 삶이 어려운데, 문제가 많은데, 소원이 많은데 왜 당신은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당신이 살아계신 것이 맞다면 어서 좀 나타나셔서 나를 도와주세요. 내 기도를 들어주세요.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나는 당신을 믿지 못 하겠습니다. 실제로 응답되지 않는 기도와 원치않는 고난으로 인해 믿음을 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세상에 악이 왜 이렇게 많으냐?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거나 살아있다면 무능하거나 사랑이 없는 분이 아니냐? 그런 이유로 하나님을 믿지 못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않음
그러나 누가복음의 우편 강도의 음성을 통해 메시야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왜 신성모독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곧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40절입니다.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트럼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명함을 요구하는 것은 대통령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내 명함을 당신에게 줬으니 당신 명함도 내게 주시오. 그래야 당신이 누군지 무슨 일을 하는지 나도 알 것 아니오? 그게 공평하지 않소?’ 그러면 아마 트럼프 대통령은 기가막혀 웃고 말 겁니다. ‘이 친구 웃기는구만. 나 트럼프요, 무슨 명함이 필요해? 경호원, 이 친구 나간다고 하네.’ 명함은 서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끼리 서로를 알리기 위해 쓰는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이나 빌 게이츠나 마이클 조단이나 방탄소년단은 명함을 쓰지 않습니다. 명함이 없습니다. 그들의 얼굴과 이름이 곧 명함입니다. 그들을 모르는 이들이 세상에 없습니까요. 그들에게 명함을 준비하고 자신을 소개하라는 것은 그들을 놀리는 것이거나 모욕하려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하물며 만군의 하나님에게 자신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은 곧 불신앙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고난의 책임을 전가함
두 번째로 이 요구가 신성모독인 이유는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라는 요구는 그럴 의무,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런 고난을 겪을 일을 하지 않았는데 겪고 있으니 이런 고난을 허락한 하나님께 책임이 있고 그러니 이 고난을 벗어나게 할 책임도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고난을 제거해 주지 않으신다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못 믿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누가는 우편 강도의 입을 통해 밝힙니다. 41절입니다. 
(눅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강도들이 겪는 일은 그들의 악행에 대한 합당한 보응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은 우리의 죄이든 이웃의 죄이든 인류가 저질러온 죄가 누적되어 일으키는 결과입니다. 어떤 고난은 그 직접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으니 불평할 것이 없고 어떤 고난은 우리에게 없기에 억울할 법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죄로 다른 이들이 겪는 고난도 없지 않으니 전체적으로 보면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물을 수 없고 그 고난을 제거해 주기를 하나님께 요구할 권리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불신앙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긍휼을 구함
강도들이 겪는 고난에 반해 예수님이 겪는 고난은 그 분의 책임이 아닙니다. 41절의 후반부를 보십시오.
(눅 23:41)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예수님이 무죄한 고난을 겪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유죄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에 아무런 책임이 없으시며 오히려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을 겪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해 주신다면 그것은 그 분의 의무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편 강도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좌편 강도와 달리 고난에서 구원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고 은혜를 구합니다. 
(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하나님 나라는 자격있는 의인이 차지하는 권리가 아니라 자격없는 죄인이 긍휼로 누리는 은혜입니다. 관리와 군인과 좌편강도의 요구에 아무 응답을 않으셨던 주님이 이 우편강도의 겸손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기증명을 요구하고 기도응답을 자신의 권리로 알며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불신앙은 하나님 나라에서 아주 멀리 있는 것입니다. 우편 강도와 같이 우리 죄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으로 무릎 꿇고 나아갈 때 우리의 귀에도 주님의 이 음성이 들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에 주님의 이 음성이 들리는지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자비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