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6:1-7/일꾼의 축복

190505 주일설교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26개 국어로 번역되어 수천만 권이 팔린 스펜서 존슨의 책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who moved my cheese’는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다루는 우화입니다. 늘 가득 차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치즈창고가 텅 빈 것을 발견한 두 마리의 생쥐와 두 명의 꼬마인간이 이 위기상황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주요 스토리입니다. 두 마리의 쥐는 즉각 결핍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 미로를 달려나갑니다. 햄과 허라는 꼬마인간은 그러나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해 괴로워하지만 결국 그들 중 허라는 꼬마인간은 두려움을 마주하고 모험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미로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딥니다. 두 생쥐와 허는 결국 새로운 치즈창고를 찾지만 햄은 끝까지 두려움을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기존의 창고가 다시 그득 차기만을 기다리며 매일 아침 텅빈 창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이야기는 위기를 마주하는 우리들의 반응에 대한 비유입니다. 위기는 가족이든 기업이든 정부든 어떤 조직이든 반드시 찾아옵니다. 변화하는 상황, 예기치 못 한 재난, 서서이 누적되어온 불합리가 결국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되어 공동체의 존립자체를 뒤흔드는 위기가 됩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는 도약하기도 하고 주저않기도 하고 심지어는 해체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위기를 맞은 공동체의 이야기를 성경본문에서 읽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강림으로 힘차게 출발한 초대교회입니다. 
 
위기를 극복한 교회
역설적이게도 그 위기는 교회의 부흥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1절입니다. 
(행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위기는 재난으로만 인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좋은 시기에도 찾아옵니다. 교회탄생 직후 교우들의 수가 많지 않았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은 12사도들의 눈 아래 다 파악이 되었고 이런저런 문제들은 서로 신뢰하는 사도들과 교인들 사이에서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을 비롯해 몇 차례의 큰 선교의 열매로 교우들의 수가 갑자기 늘어나자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사도들이 다 파악할 수도 조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팔레스틴땅에 오래 거주해온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팔레스틴 밖에서 이주해 들어온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인 사도들이 교회의 헌금으로 가난한 과부들을 돌보다보니 자연 자신들이 잘 아는 히브리파 유대인 과부들에게 더 자주 가게 되고 정보도 충분치 않고 언어도 편하지 않던 헬라파 과부들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파는 아람어를 쓰는반면 헬라파는 그리스어를 썼으니 오늘 우리 1세들이 한국말이 더 편하고 2세들이 영어가 더 편한 것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결국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나왔고 이는 초대교회의 부흥을 가로막을 수도 있는 적지않은 위기였습니다. 오늘날 한인교회도 1세와 2세 사이의 문화적 갈등과 세대갈등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이 위기를 훌륭히 극복합니다. 그 결과가 7절입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위기를 딛고 일어서 오히려 부흥의 가속도가 붙고 적대적이던 제사장들까지 회개하고 돌아오는 선교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럼 초대교회가 이 위기를 극복한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일꾼을 세우는 것’입니다. 일곱 집사를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구제를 전담하게 합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제직회 사역을 맡긴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인사는 만사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세우느냐가 공동체의 흥망성쇠를 좌우할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일 겁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을 어떻게 세웠길래 공동체가 위기를 극복하고 부흥의 고속도로를 달리게 된 것일까요? 이 사람을 세우는 지혜는 오늘날 우리가 몸담은 교회는 물로 가정과 일터, 어떤 조직이든 예외없이 적용되는 원리라고 믿습니다. 또 장로증선을 앞둔 우리 교회가 깨닫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위임의 원리
그 첫째 원리는 위임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에 갈등이 발생하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립니다. 2-4절입니다. 
(행 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행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자신들이 해오던 구제의 일을 과감히 새로운 일꾼들에게 위임하고 자신들은 말씀과 기도사역에 전념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사역이 얼마나 어려운 사역인데, 이 헌금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우리를 의지하는 과부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돼!’ 다행스럽게도 사도들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도들과 집사들과 교회 모두에 큰 유익을 가져왔습니다. 사도들은 과중한 사역의 부담을 덜고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집사들은 낭비되던 그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공동체를 위해 쓸 기회를 얻게 되었고 공동체는 더 깊은 사도들의 영적 돌봄과 더 효율적인 집사들의 행정적 돌봄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윈윈한 것입니다.
운동경기에는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수퍼스타라 할지라도 혼자서 시합을 이기게 할 수는 없으면 효율적으로 조직된 팀의 경기력을 능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설사 선수 개개인의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효율적인 팀웤이 있으면 큰 시너지효과로 경기력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운동경기 뿐 아니라 가정과 일터, 교회와 지역사회, 국가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과신한 나머지 혹은 타인의 능력을 믿지 못 한 나머지 모든 역할을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다가 자신과 공동체 모두가 고통을 겪습니다. 자신의 판단을 과신한 나머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 하고 자신이 허락한 결정이 아니면 큰 일 날 것 같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도 해는 떴고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절은 변함없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배우자의 판단을 믿어야 합니다. 동료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교우들이 나보다 더 잘 섬길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지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형제, 자매에게 맡기고 나면 우리의 마음은 더 편하고 공동체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성장을 경험합니다. 
 
책임의 원리
사람을 세우는 둘째 원리는 책임입니다. 사도들은 구제사역을 일곱 집사에게 맡기기로 하고 사람을 세웁니다. 5-6절입니다.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 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여기서 세움받은 일곱 명의 집사들의 이름이 모두 히브리식 이름이 아니라 헬라식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로 치자면 김도완, 박진희 같은 한국이름이 아니라 죠수아, 폴, 매튜같은 영어식 이름입니다. 이는 곧 일곱 집사가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왜 헬라파 유대인입니까? 그것은 첫째 그들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고 둘째 그들이 문제를 제일 잘 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브리파에게 구제가 집중되고 헬라파가 소외된다고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 문제를 풀 사람들이 또 히브리파에서 선출된다면 공정하게 문제를 풀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피해를 입었고 문제의식을 가진 헬라파에서 일꾼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파 교인들은 그 책임을 받아들여서 그들 중에서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그들은 왜 우리 과부들을 소외시키느냐고 원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섬기는 일꾼으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히브리파 사도들과 헬라파 집사들이라는 두 그룹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의 균형이 잡혔습니다. 또 문제를 풀기 원하는 이들이 직접 문제를 풀 책임을 진다는 책임의 원리를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책임의 원리는 권리를 원하면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이런저런 교우들의 요청이 들어옵니다. ‘어느 교회는 이런 것을 하던데 우리 교회도 이런 것 하면 좋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이런저런 부서를 만들테니 교우님도 이렇게저렇게 도와주셔요.’ ‘아니, 목사님. 저는 그런 것은 부담스러워 못 합니다.’ ‘그럼 교우님은 할 수 없는 봉사를 다른 누군가가 교우님을 위해 해주기를 원하셔요? 교우님이 못 하는 봉사라면 다른 분들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조직에서도 의무를 안 지면 권리도 못 누립니다. 하물며 섬김이 사명인 교회에서 원하는 것은 많은데 책임지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책임질 줄 아는 일꾼을 세우는 것이 공동체가 위기를 극복하는 또 다른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자질의 원리
마지막 원리는 자질입니다. 사도들과 헬라파 교인들이 일곱 집사를 선정한 기준을 보십시오. 3절입니다.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 
교회는 아무나 일꾼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뽑아달라는 사람도, 선거운동하는 사람도, 친한 사람도, 내 말 잘 듣는 사람도, 쪽지 돌리는 사람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망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자질이 있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 자질은 바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기도를 유창하게 하고 입만 열면 교회 교회, 말씀 말씀하고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입니까? 갈라디아서가 성령충만한 사람의 삶의 증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이 충만하면 이런 성품이 나타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대하고 시련 속에서도 기쁨을 누리고 많은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고 비방과 모욕에도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버리지 않고 오래 참고 어려운 이들을 긍휼히 여기고 선한 일을 권하고 맡은 일에 충성스럽고 과격하지 않고 온유하며 욕망과 분노를 잘 절제할 줄 아는 이들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세계가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입니다.
또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일꾼으로 세웠습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잠언서는 뭐라고 합니까?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곧 믿음이 지혜라는 말입니다. 본문 5절도 이 점을 강조합니다.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 (일곱을) 택하여
성령과 지혜가 믿음과 성령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말은 지혜와 믿음이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그래서 잘 알고, 그래서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꾀가 많고 지식이 많아서 일을 잘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그 분의 뜻대로 판단하고 일을 처리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즉 믿음이 부족하면 사람의 요령대로 일을 처리하고 세상 경험으로 교회 사역을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문제가 해결되기보다 문제가 커집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지혜대로 섬기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꾼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곧 자질의 원리입니다. 
우리 교회는 5월에 장로3인증선을 합니다. 오늘 공천위원회의 1차 투표가 있고 2주 후에는 전 교인이 참여하는 공동의회의 2차 투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뜻대로 일꾼을 잘 세우면 초대교회처럼 위기를 만나도 그것을 오히려 발판으로 삼아 큰 도약을 하게 됩니다. 위기가 기회가 됩니다. 반대로 일꾼을 잘 못 세우면 별것아닌 위기도 큰 장애물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시련을 겪습니다. 공천위원들은 바쁘더라도 꼭 참여하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꾼을 세우는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투표를 하는 것이 곧 책임을 다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책임한 사람들이 투표날에 놀러가서는 정치인들이 정치를 왜 이 모양으로 하느냐고 욕하는 이들입니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도 초대교회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실한 일꾼을 세워 크게 도약하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