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21:1-10/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

190519 주일설교 엘리야14
살인사건
인간사회에서 매일 일어나는 범죄 중 가장 비극적인 것은 역시 살인사건입니다. 이웃한 뉴욕에서는 하루 1명꼴로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고 총기범죄로 악명높은 시카고에서는 하루 2명꼴로 목숨을 잃습니다. 미국 전역으로 보면 1년에 평균 15,000명이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고 전 세계적으로는 그 희생자가 연 5백만 명에 달합니다. 당연히 이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이  신문에 실리지 못 하고 역사책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역사책에까지 실려 특별한 주목을 받는 사건은 그 의미와 파장이 무척 큰 것일수밖에 없는데요, 1914년 6월 28일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일어났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살인사건이 그러합니다. 이로인해 세계1차대전이 발발하여 5년간의전쟁으로 유럽 전역이 초토화되고 사망자만 장병 1천만, 민간인 2천만을 포함하여 총 3천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 세계대전으로 오늘날 북한인구 전체 2,500만 명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타노스의 손가락튕기기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전쟁은 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차 세계대전은 18, 19세기에 최고조에달했던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적 믿음도 송두리채 뒤흔들어놓았습니다. 
 
욕심과 살인
우리는 엘리야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왕상 21장은 나봇살인사건을 한 장 전체를 걸쳐 자세히 소개합니다. 고대왕국에서 권력자의 탐욕으로 백성이 희생되는 일은 돌부리 채이듯 흔한 일이었을텐데 왜 이 살인사건은 이토록 길고 자세히 성경이 소개하는 것일까요? 사라예보 살인사건이 인류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았듯 나봇살인사건또한 하나님 나라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놓은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은 이러합니다. 북왕국의 중심부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아합왕은 추운 겨울에 머무르는 북쪽의 이스르엘 평원의 왕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왕궁 근처에 나봇의 포도원이 자리잡고 있었고 아합왕은 그 포도원에 눈독을 들이고 나봇에게 팔라고 요구합니다. 비극의 시작은 아합왕의 이 욕심입니다. 십계명은 무엇이라고 경고하십니까? 
(신 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야고보의 경고도 이러합니다.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 인생의 비극은 대부분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욕심만 버려도 잠자리가 편안합니다. ‘시애틀의 잠못드는 밤’은 사랑 때문이지만 ‘뉴저지의 잠못드는 밤’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잠자리에 드시기 축복드립니다. 
 
법치주의
그런데 아합왕의 이 요구를 나봇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왕상 21:3)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고대왕국에서 절대권력자 왕의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명의 세기라는 21세기에도 북한이나 중동, 아프리카 같은 곳의 절대권력자들의 말을 거역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는데 백성의 목숨이 파리보다 못 했던 고대세계에서 무슨 배짱으로 왕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한단 말입니까? 미친 짓이지요. 나봇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믿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은 여호와서 금하신다 즉 여호와의 법-율법이 금지하고 있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법을 내세운 나봇의 이 반응이 아합에게도 먹힙니다. 4절을 보십시오. 
(왕상 21:4)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왕이 삐졌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철부지 십대처럼 밥 안 먹고 침대에 누워 시위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뭘 보여줍니까? 왕조차도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통치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장면은 정말 놀라고 충격적입니다. 왕의 말이 곧 법이거나 법이 있어도 지배자에게만 유리하게 만들어진 법을 초법적인 존재인 왕이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해서 제 유리하게 통치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모든 고대왕국과 달리 이스라엘은 왕조차도 모든 백성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통치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고대왕국 중 유일하게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나라 즉 법치주의 국가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국가통치의 이상인법치주의와 놀랍게도 일치합니다.
우리는 대통령의 명령이라도 부당하다 생각되면 따르기를 거부하고 소송을 걸어서 취하시키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통치자의 명령이 이렇게 무시되던 때가 있었습니까?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 행정부 사람은 자기 식당에서 밥 못 먹는다고 써부치고 장사할 수 있는 시대가 인류 역사에 일찌기 존재하기나 했었습니까?  대통령하고 트위트로 말싸움할 수 있는 시대가 단 한순간이라도 인류역사에 존재하기라도 했습니가? 불과 한 세대 전 한국에서만해도 술자리에서라도 대통령 욕했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고초를 겪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는 시대를 살지않았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권력자나 군대가 아닌 법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법치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계 석학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책 역사의종말에서 현대인이 도달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사회는 인류역사발전단계의 종착역이라고 결론내립니다. 즉 역사발전의 종착역에서나 이룰 수 있는 사회의 이상을 이미이스라엘은 왕국건설단계에서부터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자신의 욕심과 힘으로 세운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디자인하시고 유지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하셔서 세우신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일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은 수천 년 역사를 통해 문명을 세우고 발전시켜온 성경의 능력과 깊이를 몰라도 너무모른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꼴입니다. 성경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밝혀온 인류의 보화이자, 대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다르고 인간이 만드는 세상과 다른 세상을 창조합니다. 그 세상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일개 시민도 하나님의 법에 의해 보장받는 왕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복지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세우고 전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세상나라의 질서
그러나 세상의 나라는 이 법을 이해하지도 따르지도 못 합니다. 더 나아가 세상나라는 하나님나라를 파괴합니다. 이를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보여줍니다. 7절입니다. 
(왕상 21:7) 그의 아내 이세벨이 그에게 이르되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아합의 고민을 들은 이세벨의 말은 ‘무슨 왕이 이렇게 힘이 없냐’는 뜻입니다. 왕이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지고 거역하는 인간은 칼로 다스려야지, 하나님의 법이 다 뭐냐는 말입니다. 그녀는 모든 고대왕국의 통치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를 그대로 가진 세상나라의 대표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나고 자라며 율법을 배운 이스라엘여자가 아니라 두로와시돈에서 시집온 이방공주였습니다. 그녀가 자라며 보고배운 왕의 모습은 권력과 부를 위해 백성들의 권리와 생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무자비한 지배자였고, 그녀가 아는 세상은 이긴 자가 모두 갖는 승자독식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가 하던 대로, 그녀가 보고배운 대로, 모든 세상나라 통치자들이 하는 대로 계략을 써서 나봇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이 일은 그 자체로도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지만 그보다 더 크고 무서운 비극을 이스라엘에 가져옵니다. 그것은 그동안 하나님의 법이 무서워 힘이있어도 저지르지못했던 살인과 착취와 억압과 독점의 온갖 악행을 지배층이 두려움 없이 저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눈 뜨게 해주었고 아합왕이 열어준 길을 통해 이제 이스라엘의 권력자들은 브레이크 없는 착취와 독점의 질주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스라엘은 멸망의 고속도로에 올라탄 것입니다. 
 
충돌하는 두 나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래 세상사람은 하나님의사람을 공격해 왔습니다. 세상나라는 하나님나라를 무너뜨려왔습니다. 세상의 왕 마귀는 하나님나라의 왕 하나님을 거역하여 온갖 모략을 꾸며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도록 한 이래 하나님의 사람들을 죄와 멸망으로 빠뜨리려 온갖 악행을 저질러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귀의 공격을 이렇게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세례 요한이 일으킨 회개운동을 마귀는 무너뜨리려 공격해왔다는 말이고 급기야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순교당합니다. 요한을 죽여서 회개운동을 끝장냈듯 마귀는 예수님을 죽여서 하나님나라운동도 끝장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헤롯이 요한을 죽이듯 마귀는 종교인들과 빌라도를통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죽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인들의 죽음과는 달리 예수님의 죽음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세상나라의 시도가 실패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마귀의 시도가 부질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결코 무너지지않고 세상 법을 기어이 이기고야 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의 충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아합은 나봇을 죽이고 이세벨은 포도원을 빼앗고 하나님의 법은 무시되고 세상법이 모략과 우격다짐으로 관철됩니다. 독재자는 국민들을 학살하고 강자는 약자를 착취하고 소수인종은 차별받습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새소망으로 충만하였듯 하나님나라의 승리를 믿는 자들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계속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