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3:14-17/성경은 진리인가

190623 주일설교 성경변증1
성경에의 도전
최근에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해 오셔서 잠깐 요약해 소개합니다. 
‘목사님, 성경을 읽다보니 성경의 절대적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믿음은 그 말씀을 읽어 가면서 생긴다는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이 여러 신화와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난다는 주장을 듣고 의문이 생깁니다. 기독교의 원형이라는 수메르 신화, 그 안에 담긴 창세기 얘기들, 노아 홍수. 예수님과 닮은 호루스 얘기. 성경의 이야기와 예수님 얘기가 다양한 고대 신화의 구성을 차용했다는것, 타 종교들에서 나타나는 복음서의 예수님 모습들. 유명한 태양신 이야기, 전세계에 퍼져있는 아이를 안고 있는 여신들, 사탄의 이야기 등을 들었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또 다른 교우께서도 질문해 오시기를 BBC방송국의 여러 다큐멘터리를 즐겨 봤는데 거기서 주장하기를 성경은 콘스탄틴 황제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정리한 것이요, 역사적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믿고 있는 바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주장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 한동안 교회를 다니지 못 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에 의문을 갖게 하고 또 멀어지게 만드는 데에는 이상과 같이 떠돌아다니는 근거없는 주장들이 큰 역할을 합니다. 인터넷의 바다에 떠다니는 시대정신이란 동영상을 비롯한 각종 주장들은 잘 살펴보면 학문적 근거가 없이 다빈치코드의 저자 댄 브라운 같은 소설가, 대중선동가 혹은 무신론전도자들이 여기저기서 모은 정보를 짜집기해서 올린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의심을 심어주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전제의 허구성을 사람들이 잘 파악하지 못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간이 되는대로 과연 성경이 믿은 만한 책인가 하는 주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기독교 진리의 가장 중요한 근거인 성경을 공격함으로써 기독교 진리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오늘날 만연해 있습니다. 오늘은 서론으로 성경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시도해보고 앞으로 몇 주간은 성경의 내용을 다루는 개별적인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성경의 성격
먼저 이런 주장들의 뒤에는 성경이라는 책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경을 공격하는 이런 주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런 내용이 과학적으로 말이 돼? 성경의 이런 내용은 역사적으로 허구야. 그러므로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신화야.’ 언듯 들으면 반박할 수 없는 합리적인 주장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마치 이런 억지와 같습니다. ‘종족번식의 목적으로 뭉쳐진 이기적 유전자의 결합체에 불과한 네가 자녀를 사랑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쓴다는 것이 말이 돼? 사랑이니 의니 하는 추상적 개념은 모두 허구야.’ 유전자와 번식이라는 물리적 실체와 사랑과 의라는 영적 실체는 서로 장르가 다릅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고 해놓고 왜 울어? 거짓말 아니야?’ 시를 계약서로 읽는 격입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조크를 했는데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이는 격입니다. 전자제품을 주문했는데 110v 파워코드를 220v 콘센트에 안 들어간다고 이 제품은 불량이라고 주장하는 격입니다.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성경은 과학책도, 역사책도 아니고 진리의 책이자 계시의 책입니다. 성경은 과학이나 역사를 전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 구원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계시된 책입니다. 우리 교단 해외한인장로회 신조 제1조를 보십시오. 
  1.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성경은 과학적 사실을 규명하려는 과학책도, 역사적 사실을 남기려는 역사책도 아니라 신앙과 행위에 대해 기준을 제시하는 책이며 이 점에 있어서는 정확무오한 책입니다. 역시 우리 교단이 고백하는 신앙고백인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서 ‘제1장 성경에 관하여’의 한 부분을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믿음과 생활의 기준이 된다.’
여기서도 강조되는 바 성경은 과학의 기준, 역사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준, 생활의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과학적 발견이나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내용도 담고 있단 말인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진리로 믿어야 합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경은 과학이나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후에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만 성경은 진화론과 같은 과학적 이론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세상창조의 기원으로서 하나님을 선언합니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으로 고백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성경이 과학적 발견과 역사적 기록을 모두 정확하게 일치하여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이런 발견과 기록은 계속 바뀌는 것이기에 바뀌지 않는 책인 성경이 담는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만, 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감으로 기록된 책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도 선언했지만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제자이자 에베소 교회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쓰고 있는 글입니다. 
(딤후 3:15) 또 (너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의 길을 가도록 교훈하고 잘못가면 책망해서 바로 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책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하게 만듭니다. 선한 일을 하도록 돕습니다. 자, 그럼 이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습니까?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감동 즉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으로 썼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교회가 믿는 영감설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주의 교회가 받아들이는 영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으로는 기계적 영감설과 유기적 영감설이 있습니다. 
기계적 영감설이란 성경을 쓴 사람이 마치 기계가 하듯이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말씀을 한 자, 한 자 받아썼다는 생각입니다. ‘자, 모세야. 이렇게 받아써라. 태, 초, 에, 하, 나, 님, 이, 천, 지, 를…’ 이 믿음을 가지는 이들은 성경 한 글자 한 글자를 신성시하며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며 한 글자, 한 단어도 오류가 없는 책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 오류에는 과학적, 역사적 오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성경의 진리됨을 공격하는 이들이나 그 공격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는 이들은 사실 이 기계적 영감설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셨는데 성경의 기록에 오류가 있다면 곧 하나님이 오류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성경도 하나님도 믿을 수가 없어. 
 
유기적 영감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유기적 영감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감과 성경의 기록자가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며 협력하여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마치 죽어있거나 기계적이지 않고 살아있는 생물체의 각 기관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감이 성경기록자에게 성경기록의 동기와 메시지를 주셨고 기록자는 자신이 알게 혹은 모르게 그 하나님의 영감의 동력으로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록자의 세계관과 가치관, 경험 등이 묻어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기록자의 세계관과 가치관, 경험 등을 걸러내고 발견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시민이면서 박해가 본격적이지 않았던 시대에 선교를 나섰던 사도 바울은 세상 정부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행하므로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만 로마정부에 의해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그 자신도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은 로마정부가 적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공격합니다. 
모세로부터 구전되던 전승을 창세기로 최종 정리, 편집한 시기를 기원전 5세기 경으로 봅니다.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바벨론의 포로시대를 겪은 이들입니다. 그들이 믿고 경험하고 고백하는 세상의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묘사할 때 당시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바벨론 땅 즉 수메르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3-4천 년 전 고대인들이 창조주를 고백하기 위해 사용했던 세계관과 언어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우주관과 같지 않다고 그들이 잘못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습니까? 그럼 왜 전능하신 하나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해되는 세계관으로 기록하게 하지 않을셨습니까? 그랬다면 정작 이 기록을 듣고 읽었던 수천 년 전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의 언어로 이해되는 세계관으로 기록했다 치더라도 지금부터 수백, 수천 년 후 사람들이 읽으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가 창세기를 읽는 것과 똑같을 겁니다.
 
바른 성경읽기 
비유하자면 성경해석은 사금채취와 유사합니다. 강변의 모래를 접시에 담아 살살살 흔들어서 토사와 모래, 자갈 등은 물에 흘려보내고 사금가루만 건져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인간의 세계관, 가치관, 경험으로 생긴 편견 등을 걸러내고 반짝이는 하나님의 영감을 남깁니다. 
이런 설명이 불편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럼 성경에는 우리가 걸러내야할 말씀이 있다는 말입니까? 일점일획도 버리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본문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66권 1,189장 31,173절 788,259단어를 모두 신성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율법 정확히 말하면 구약의 율법서 오경 안에서도 모세가 전한 율법의 말씀이 모두 성취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그 율법을 하나라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말씀도 신약시대의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빛에 비추어 재해석하여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식이 부모를 거역한다고 돌로 쳐죽이지도 않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토지를 사유화하고 있고 유대인들이 회당가는 안식일을 지키지도 않습니다. 만약 문자 그대로 성경을 믿고 지켜야 한다면 우리는 모두 율법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려면 제칠일안식교로 다 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순종합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지만 과학과 충돌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지만 역사를 뛰어넘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구원의 길을 계시하는 진리의 책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 때 성경을 비과학적이고 비역사적인 신화라고 공격하는 이들의 오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모든 시대를 관통하며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는 성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리의 등대로서 밝은 빛을 밝히는 성경을 통해 구원의 항구에 이르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