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30-31/기적은 사실인가

190714 주일설교 성경변증4
기적은 불가능한가
어떤 술취한 사람이 술집에서 나와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차를 파킹한 곳에 도착했을 때 차키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분명 술집을 나설 때는 손에 쥐고 있었으니 골목길 어딘가에서 잃어버렸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그는 지나온 골목길을 돌아보았습니다. 중간에 밝혀진 가로등을 보고는 그 아래로 가서 더듬거리며 키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 때 뒤늦게 술집에서 나온 친구가 묻습니다. ‘자네, 가로등 밑에서 뭐 하나?’ ‘차키를 찾고 있어. 떨어뜨렸거든.’ ‘그런데 왜 계속 가로등 아래만 서있나?’ ‘이 봐. 여기는 잘 보이잖아. 다른 곳은 안 보이는 걸.’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자 그는 낙심한듯 말합니다. ‘이보게, 그냥 가세. 내가 키를 떨어뜨리지 않았나 봐.’ ‘이 봐, 밝은 곳에 보이지 않는다면 저기 어두운 곳 어딘가에 떨어져 있지 않겠나?’ ‘무슨 소리야? 밝은 곳에서 보이지 않으면 키가 없기 때문에 안 보이는 거야.’
미국 철학학회 회장을 역임한 철학자 앨빈 플란팅가의 비유를 조금 각색해 보았습니다. 잘 보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 없으면 키가 없을 것이라고 우기는 이 사람이 빠진 모순은 무엇일까요?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견 혹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편견입니다. 앨빈 플란팅가는 이 비유를 세상의 모든 일은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므로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내놓았습니다. 가로등 불빛은 자연법칙입니다. 가로등 아래는 자연법칙으로 설명이 되는 자연세계입니다. 가로등 불빛 밖은 자연법칙으로 설명이 안 되는 초자연의 세계 혹은 영의 세계입니다.
성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많은 이들은 기적 이야기를 그 이유로 꼽습니다. 동정녀 탄생,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 급기야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은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을 받아들이기 힘든 책으로 치부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그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말은 곧 가로등 아래에서 발견되지 않으니 이 골목에 키는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로등 아래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가로등 밖에 어딘가에 있을 수 있듯이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자연현상을 벗어난 초자연적 현상일 수 있습니다.
 
기적을 믿는 이유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믿으며 성경에 소개된 기적도 당연히 믿습니다. 기적의 가능성을 믿는 이유는 이미 이 세상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부터 봅시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자연법칙은 이 질문의 답을 내놓거나 설명하지 못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 생명의 존재가 곧 기적이 아닙니까? 
생명발생에 대해 오늘날 서구인들은 대개 둘 중 하나를 믿습니다. 첫째는 지적설계론이요, 둘째는 화학진화설입니다. 지적설계론은 지적인 존재에 의해 생명이 설계되었다는 믿음으로 기독교의 창조설이 그 중 대표라 하겠습니다. 화학진화설은 여러 종류의 가설이 있습니다만 요약하자면 유기물덩어리에 적절한 화학적, 전기적 자극이 가해져 생명체가 탄생했다는 주장입니다. 흔히 지적설계론은 믿음이요, 화학진화설은 과학이라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화학진화설 역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화학진화설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 사건 역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유기물 덩어리에서 유기생명체가 만들어지는 사건이 관찰된 적이 있습니까? 실험을 통해 발생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현재 지구에서는 그런 사건이 발생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오래 전 지구는 지금과 환경이 많이 달랐다고 가정합니다. 아무튼 그렇다치더라도 그 오래 전 지금과 다른 환경에서 생명이 발생한 사건은 역시 관찰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실험에 성공한 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찰도, 증명도 불가능한 가설을 받아들이는 것과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그렇게 발생한 유기생명체가 가장 단순한 단세포 박테리아의 DNA 한 가닥을 구성할 확률조차도 zero에 가깝다고 수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이렇게 희박한 확률의 벽을 넘기위해 진화 과학자들은 전능한 우연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신을 믿는 것은 비합리적인데 전능한 일을 하는 우연을 믿는 것은 과학적인 것일까요? 백합꽃씨 하나, 도롱뇽 정자 하나 안의 DNA정보만으로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모든 단어의 양을 가볍게 뛰어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DNA는 얼마나 놀랍도록 정교하고 정확하겠으며 그 DNA가 만들어내는 우리 신체의 아름다움은 또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헝가리계 미국 물리학자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진 위그너는 말하기를, ‘생명이란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볼 때 기적 그 자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상우주론을 처음 발표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인 프레드 호일 경은 말하기를, ‘생명이 자연의 눈먼 힘에 의해 우연히 탄생했다는 지극히 작은 확률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차라리 생명의 기원이 지적 행동에 의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인다. 내 생각에 후자가 덜 틀린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일상이 기적인 삶
저는 아내의 태에 잉태된 세 생명이 태어나 아이들로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저의 DNA를 공유한 후손 그 이상입니다. 그들의 존재도 기적이요, 그들의 고사리 같은 손과 발도 기적이요, 그들이 날마다 자라나는 것도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저는 그들이 저에게 주는 기쁨과 소망과 보람을 생물학의 법칙,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저 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붉고 푸르고 노랗게 물드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 꽃과 벌새와 독수리와 돌고래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인간이 의와 진리와 사랑과 예술과 꿈과 스포츠를 통해 이루는 일들을 자연법칙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루는 딸 사랑이가 키우는 조그만 어항의 물고기 거피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밥을 뿌려주면 맹목적으로 물 위로 입을 내밀고 달려듭니다. 그들보다 큰 물고기를 함께 넣으면 안 됩니다. 거피를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작은 물고기도 넣으면 안 됩니다. 거피가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그 조그만 어항 안에서는 오로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만 작용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가 고파도 의와 사랑과 진리를 생각하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배만 부르면 만족하는 물고기가 아니고, 나보다 작으면 잡아먹고 크면 잡아먹히는 거피가 아닙니다. 우리는 생존 못지않게 의와 사랑과 진리의 삶을 추구하고 희생과 헌신과 배려의 가치를 아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복잡한 교향곡을 작곡하고 연주하고 감상하고 느끼고 환희와 비애를 경험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존재가 기적이요, 이 세상이 기적이요, 삶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 (시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시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 (시 8: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기적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삶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부인하고 삶을 자연법칙에 구속되는 동물과 돌덩이와 같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 모든 동물들과 돌맹이들조차도 기적의 일부인데 말입니다. 
 
기적의 본질
우리가 기적의 본질을 알면 더더욱 기적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기적을 마술적인 능력이나 자연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예수님의 질량보존의법칙을 거스르고 오병이어를 오천 명이 먹을만한 양으로 부풀리셨고 대류법칙을 거슬러서 풍랑을 잠잠케하셨고 생물학법칙을 거슬러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셨고 당신 자신마저도 죽음을 거슬러 부활하셨습니다. 내게 그런 엄청난 능력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수퍼히어로가 될텐데… 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마술적 능력도, 자연질서를 거스르는 예외적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죄와 악이 파괴한 세상의 무너진 질서를 창조 때의 그것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굶주림도 자연의 위협도 질병도 죽음도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죄와 악으로 파괴되어 처음의 모습을 잃어버린  세상을 창조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리는 자들을 먹이셨고 자연의 위협을 막으셨고 질병을 고치시고 죽음에서 건져주심으로 파괴된 세상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마술적 능력이 가능하다거나 자연질서를 거스르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지금도 세상을 파괴하고 있는 마귀의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너뜨리고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계심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병든 세상이 마침내 완전히 치유되고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완성될 것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위해 부름받은 우리들이 그 기적의 일부가 되어 치유와 회복의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적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굶주림을 초래하는 탐욕의 바벨탑과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무분별함과 질병을 가져오는 온갖 중독과 마침내 죽음을 초래하는 죄와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이 힘겨운 싸움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끝까지 싸우고 마침내 승리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믿는 자는 이 싸움에서 이깁니다. 여러분은 기적을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기적을 믿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