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45:6/하나님은 공평하신가

190804 주일설교 성경변증7
선택과 결단의 시이소타기
오늘은 지난 주 설교에 이어집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죄인의 구원이 그 자신의 믿음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에 복음이 닿지 않은 시대와 지역의 사람들 unreached people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이후 교우들께서 여러 질문을 쏟아놓으셨는데요,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에 달린 문제면 인간의 믿음의 결단, 자유의지는 무슨 소용이 있느냐? 어차피 선택되어 구원받을 것이라면 우리가 잘 믿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느냐 혹은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느냐 또 선택받은 사람이야 은총을 노래하겠지만 선택받지 못 한 사람은 뭐냐 그렇다면 하나님을 불공평하시지 않느냐 라는 등이었습니다. 이 질문들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 중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쉽지않은 것으로 한마디로 말해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이해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부득이 간략하게 신학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는 각각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할을 강조하며 대립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구원의 가능성을 하나님이 열어놓으시지만 믿음의 결단을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다면 구원은 없는 것이며 인간은 선한 결정을 할 수 있다고 하여  구원에서 인간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과 의지에 대해 낙관적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반면 어거스틴은 타락 이전의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한 결정을 할 수 있었지만 타락 이후 그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이 없으면 믿음의 결단도 선한 행위도 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 본성과 의지를 앞서고 압도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강조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펠라기우스를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면 은총의 신학이 승리하고 자유의지는 패배한 것일까요? 그렇기도하고 그렇지않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비슷한 논쟁이 교회사 내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종교개혁자 칼빈과 알미니안의 대립입니다. 
시간관계상 자세한 설명은 피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의 후예라 할 칼빈은 창세 전부터 선택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천국에 이를 때까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에게 부여되어 구원이 가능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에반해 펠라기우스의 후예라 할 알미니안은 예수님은 선택된 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고 하나님의 선택은 그 은혜를 누가 받아들일지를 미리 아셔서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이 은총은 인간의 거부와 불순종으로 거부될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의 믿음의 결단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칼빈의 가르침은 성경이 일관되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잘 드러내는 반면 인간의 책임을 소홀히 여기고 공평해야 한다는 인간의 본성적 요구에 의문을 남깁니다. 반면 알미니안의 가르침은 선택과 책임이라는 원리에 적용하여 공평함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의 역할을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다행히 종교개혁시대에는 이단선언 없이 각각의 신학이 그 후예들에 의해 교파로 자리잡습니다. 우리 장로교회가 어거스틴과 칼빈의 후예라면 감리교회는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안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크기
자,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초대교회에서 은총의 신학이 승리했는데 여전히 자유의지의 신학도 중요한 교파로 자리잡은 것일까요? 한국에서 장로교의 가장 크지만 미국에서는 연합감리교회가 미국장로교회의 두 배 이상의 크기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냐, 인간의 결단이냐의 어느 한쪽의 승리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모두를 선언합니다. 한 구절씩만 확인해 보지요.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왜 성경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얻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믿고 결단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둘 모두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왜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진리는 항상 역설적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얻지만 동시에 행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동시에 의인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높아집니다. 죽어야 살아납니다. 고난이 오히려 유익입니다. 이렇게 진리가 역설적인 이유는 진리가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기에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진리를 이해하기에 우리의 지성이라는 도구는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 위에서 살아갑니다만 지구를 제대로 보지 못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지구라는 존재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왜요? 지구는 우리의 시각이 인지하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위성사진으로 찍으면 되지 않나요? 네,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구의 한 단면일 뿐 지구 전체를 동시에 보지는 못 합니다. 태평양을 보노라면 대서양은 건너편으로 넘어가지요. 대서양을 볼라치면 대평양이 안 보입니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펼쳐진 지도를 볼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에 볼라치면 적도에서 멀어질수록 북극과 남극으로 갈수록 실제보다 더 커져서 왜곡이 발생합니다. 무슨 수를 써도 왜곡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지구라는 거대하고 둥근 존재를 인지하기에는 우리의 시각이라는 도구가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이 진리를 이해하려할 때 발생합니다. 구원이라는 영적 진리를 이해하기에 우리의 지성과 그 지성에서 나온 언어와 개념은 너무나 부족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그 은혜로운 선택의 절대적 권위는 볼 수 있지만 인간의 역할이 저 반대편으로 넘어가 버리고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면 자유로운 의지의 중요성은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가 이번에는 넘어가 버립니다. 은총과 자유의지를 동시에 펼쳐놓고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 어디선가 왜곡이 발생해서 아귀가 딱 맞지 않는 부분이 생깁니다. 구원사건은 인간지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건 즉 신비의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사명의 선택과 구원의 선택
왜곡이 발생하는 것을 무릎쓰고 이 은총과 결단, 선택과 자유의지 사이의 조화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선택을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사명의 선택과 구원의 선택입니다. 사명의 선택이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위해 특정인이나 집단에게 사명을 맡기기 위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노아를 새로운 인류의 시조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택하시고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에서가 아닌 야곱을 그 후손으로 택하시고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류를 위한 복의 통로로 택하시고 혹은 교회를 구원의 통로로 택하시는 것은 모두 사명을 위한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특정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선택입니다. 여기에는 선택과 동시에 선택받지 못 한 배제가 있습니다.
반면 구원을 위한 선택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배제가 없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이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삭과 야곱을 사명을 위해 택하셨지만 선택받지 못 한 이스마엘과 에서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만 구원하신다고 믿고 이방인들을 버리신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을 복의 통로로 삼기 위한 것이었고 그들을 통해 앗수르 같은 이방민족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요나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도 아니요,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구절들을 보십시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딛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마 5:45) …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는 것이 영원 전부터 가지신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입니다. 
불가항력적 은혜
죄인들이 이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감당하기 힘든, 거역하기 힘든, 불가항력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이 은총을 끝까지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안 받는 것입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반면 겸손히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리게 된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보니 사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죄와 악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은총을 베푸셨는지를 깨닫습니다. 자연만물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십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선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율법을 통해 의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시 19: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율법)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율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자비로 죄인들의 거역을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사 48:9) …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때가 이르러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십니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깨닫게 하고 거듭나도록 만드십니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런데 성경을 보니 이 모든 구원의 역사가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하필 왜 나같은 죄인에게 부어주셨는지 설명할 방법이라고는 나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의 선택때문이라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 구원받은 죄인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결과 토하듯이 외치는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은 우리는 택하고 저들은 버리셨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택함이 하나님이 부어주시기로 예정된 은혜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었지만 그 믿음조차도 성령의 역사로 거저 주어진 것이요, 우리가 의롭게 되었지만 그 의로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 때문이며, 이제와서 내가 결단한 것 같지만 창세 전부터 하나님은 구원을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예정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요, 너무나 공평한 것일 뿐 아니라 감당하기 힘들도록 은혜로운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은 그 은혜 때문에 의롭게 살지 않을 수 없는 사랑의 압박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자들은 죽어가는 이들에게 그 사랑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의무를 지는 것입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 어머니의 사랑 덕분에 생명을 받은 것을 깨달은 자녀는 그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라도 함부로 살 수 없고 바르고 행복하고 열심히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 전부터 여러분을 위해 예정된 이 감당하기 힘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여러분은 느끼고 계시는지요? 이 사랑과 은총의 힘으로 오늘도 이 복음을 누리고 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