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61:1-3/성취되는 허망한 꿈

190811 광복기념 주일설교
허망한 꿈
꼭 100년 전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지 3달여가 지난 5월 30일자 매일신보에 당시 한 지도층 인사가 쓴 사설의 일부를 읽어드립니다. 
‘요즘 각 지방의 소식을 들으니 (3.1운동 이후) 소요사태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데 혹자는 군대의 무력진압 때문이라 하나 나는 여러분이 진심으로 지난 잘못과 오늘의 시국을 깨닳아서 그런 줄로 알고 기분이 상쾌하오… 본인은 조선독립설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깨닫게 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장래 행복을 도모하고자 하오… 국제경쟁이 과격하지 않을 때도 우리 조선이 독립을 완전히 유지하지 못 하였는데 하물며 오늘처럼 1차 대전으로 전 세계가 개조되는 시대가 닥쳤으니 이만 천여리에 불과한 강토와 천백여만의 인구로 독립을 의논함이 어찌 허망하지 않겠소? … 해외에 있는 조선인 중에도 혹자는 조선의 사정에 어두워 독립을 이야기하며 의외의 행동을 일삼아 우리에게 화를 미치게 하니 현명하신 여러분은 오늘 이후로 이와같은 불의의 일이 혹 있을지라도 이번 일(3.1운동)을 되돌아보고 근신해야 할 것이오…’ 
누가 쓴 글일까요? 바로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의 글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을 비롯한 일체의 독립운동이 얼마나 허망한 꿈인지를 강조합니다. 일본이 동양평화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하며 가난하고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는 우리까지 합방하여 잘 살게 해주고 있는데 왜 독립과 같이 불가능하고 허망한 꿈을 꾸며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냐고 훈계합니다. 당시 수탈과 착취에 신음하던 조선 민중 열 명 중 한 명이 거리로 달려나와 목청껏 외쳤던 독립이 허망한 꿈이며 우리는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으며 일본의 희생으로 잘 살게 되었다는 이완용의 식민지 역사관을 읽노라면 지금도 피가 꺼꾸로 솟는 것이 저만의 기분이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이완용이야 당시 일본으로부터 백작과 후작의 작위와 총독부 고위직, 엄청난 하사금 등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대부분의 조선민중은 압제와 수탈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이완용의 주장처럼 조선독립은 과연 허망한 꿈이었습니까? 허망한 것은 조선독립의 꿈이 아니라 이완용의 주장이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광복 74주년을 맞는 대한민국은 독립을 쟁취하고 지켜내었을 뿐 아니라 세계 6위의 수출대국, 국내총생산 GDP 12위의 경제대국이자 세계최고수준의 문화강국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존재인 줄 알았던 일본을 꾸준히 추격한 결과 많은 경제지표에서 거의 따라잡고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금 IMF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이면 구매력평가기준 1인당 GDP는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예정입니다. 현재도 국가신용등급은 일본보다 두 단계 높습니다. 여름에 한국을 다녀온 교우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한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인 이 미국보다 어떤 면에서도 더 편하고 살기 좋다는 겁니다. 만약 이완용의 주장을 받아들여 허망한 꿈을 꾸기를 포기하고 독립운동도 포기하고 황국신민으로 살기로 결정했다면 과연 오늘날의 이 번영한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은 교회창립 47주년 기념주일이자 동시에 광복 7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광복의 기쁨을 되새기는 이 주일에 우리는 무한한 감격과 동시에 대단히 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지금 조국이 처한 상황과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는 현대판 이완용의 논리 때문입니다. 
 
되살아나는 이완용
한국은 지금 강제징용피해자에 대한 대법원배상판결에 불만을 품고 경제보복을 시작한 일본과 큰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일본의 극우세력의 주장과 만행만으로도 충분히 분개할 만한데 거기에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은 한국 내에서도 거기에 동조하는 주장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6일 엄마부대봉사단의 주옥순 대표와 10여 명의 회원은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아베 수상님, 한국의 지도자가 무력해서, 무지해서 한일관계의 모든 것을 파괴한 것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밝혔습니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에서 일제식민지배 기간에 있었던 강제동원, 위안부 성노예화는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노동과 성매매로 나간 것이며 식량수탈 등도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 일제식민지 기간 덕분에 한국의 경제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설파자이기도 합니다. 100년 전 일제식민지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던 주장들이 오늘날 다시 카톡과 유투브를 타고 한국은 물론 이 미주지역에도 퍼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의 설교를 CD로 듣고 있다며 한 외부교인이 이메일을 보내오셨습니다. 일제식민지 시절에 근대화의 발판을 만들었고 박정희 대통령 때 위안부보상으로 3억 불을 받아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서 지금의 경제발전을 일으켰는데 반일을 하자면 어떻게 하느냐, 줄건 주고 챙길 건 챙기면서 윈윈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의 요구대로 대법원의 강제징용배상판결을 철회하고, 민주국가에서 법원판결을 어떻게 철회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신 반도체 소재 등의 사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방송이 모두 좌파의 손에 넘어가서 진실이 보도되지 않으니 유투브를 보라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정말 참담한 심정으로 답장을 썼습니다. 자, 강도가 여러분의 집을 빼앗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린했습니다. 그가 후에 만 불을 줘서 그 돈으로 어머니 치료비로 썼다면 그 강도에게 고마워해야 하나요? 어머니가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으니 입 다물고 지내는 것이 맞는 건가요?
식민지 36년 동안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과 우리 아버지들을 강제징용으로, 어머니들을 정신대로 끌고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초를 겪게 한 죄가 잘못을 인정한 배상금도 아닌 경제협력자금이라는 3억 불로 면제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식민지 36년을 착취당하지 않고 자주적으로 근대화에 매진했다면 그 돈 없이도 지금보다 더 큰 경제적 성장을 이루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이완용의 논리대로 우리는 스스로 독립도 이루지 못 할 민족이라 일본의 도움이 없었다면 경제발전도 이룰 수 없었을까요?
100년 전 이완용의 논리가 다시 부활하는 세태를 보며 74주년 광복주일을 맞는 심정이 감격스러우면서도 착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날의 허망한 꿈
인생의 문제를 대하는 오만가지 태도, 오만가지 대책이 있습니다. 그 태도와 대책은 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를들어 이완용은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는 매우 머리가 비상한 수재였습니다. 그는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에 둘러쌓인 조선의 현실을 정확히 계산하고 그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어차피 식민지가 될 거라면 저항하다가 피를 흘리기보다 순응하여 비굴하지만 황국신민으로 살며 희생은 최소화시키고 기왕이면 자신은 기회를 잡아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원칙주의자도 있고 이상주의자도 있고 허무주의자도 있습니다. 모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판단 즉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치를 둡니까? 무엇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때로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세상법과 충돌하기도 하고 세상의 이상과 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라는 긴 호흡으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됩니다. 현실적 계산을 뛰어넘어 실현됩니다. 세상법은 폐기되고 바뀌지만 하나님의 뜻은 실현됩니다. 인간의 이상과 사상과 철학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치않고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럼 자유와 자주, 독립문제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말씀은 바벨론 포로기를 견디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여호와의 영을 받은 메시야의 사명이 무엇인지가 설명됩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희년)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심판)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메시야의 사명은 곧 가난한 자에게 부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고침을, 포로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의의 백성들에게 해방의 해 희년을 선포하고 불의한 압제자들에게 보복의 날 심판을 선포하여 불의로 고통당하는 슬픔 자들을 위로하여 기쁨과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눅 4장을 보면 예수님은 공생애 첫 설교의 본문으로 이 구절을 인용하시고 당신의 사명이 바로 이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와 해방과 치유와 복지와 은혜와 정의를 세상에 선포하고 전하는 이들입니다. 그 길이 때로 허망한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세상의 법과 질서를 초월하고 세상사람들의 이상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독립이라는 꿈을 꾸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꾸어야할 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조국의 평화로운 통일입니다. 물론 넘어야할 장애물이 많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산처럼 높습니다. 그러나 100년 전 그토록 허망하다는 독립의 꿈도 이루어졌는데 통일의 꿈인들 성취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말입니다. 
몇 년 전 무장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그려 크게 성공한 영화 암살의 한 대목입니다.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총독부의 군대와 싸우느라 독립투사들이 죽어나가는 현실에 좌절해 청부암살자가 된 하와이 피스톨이 여전히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안옥윤에게 묻습니다.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나?”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알려줘야지… 우리는 끝까지 싸우고 있다고.” 
선조들이 허망한 꿈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준 덕분에 우리 후손들은 이토록 번영한 나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어렵지만 의와 진리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더 복된 세상을 물려줄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된 자주독립과 통일의 허망한 꿈을 위해 끝까지 싸우는 성도들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