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5:9/화평케 하는 자의 행복

191222 주일설교 산상설교8/대강절4주
최고의 무술
내영혼의닭고기 스프라는 책에 실려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7, 8년 전에 들려드린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다시 한번 나누고 싶습니다. 테리 돕슨은 직장 때문에 일본에 거주하던 젊은이였습니다. 그가 탄 한산한 도쿄 지하철의 평화는 어느 정거장에서 올라탄 난폭한 사내에 의해 깨졌습니다. 지저분한 막노동자 복장에 덩치가 큰 그는 술냄새를 풍기며 주변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팔을 거칠게 휘둘러 댔습니다. 아기를 안은 여자가 그 팔을 피하다가 늙은 부부의 무릎 위로 넘어졌습니다. 승객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객차 뒤편으로 피했습니다. 젊고 의분이 넘쳤던 테리는 그 상황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버려두었다가는 누군가가 다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역시 덩치 좋은 20대 젊은이로 하루 3시간씩 가라데를 수련하고 있었기에 그 술주정꾼 정도는 간단히 제압할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가 벌떡 일어나 마주서자 사내는 누군가 덤벼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며 화난 목소리로 으르릉 댔습니다. ‘아하, 외국놈이 덤벼보겠다는 건가? 잘 됐어. 혼이 나고 싶은 게로구만.’ 테리는 그가 덤벼들기만 하면 업어치기로 땅에 매다꽂을 작정으로 자세를 취하고 그를 도발하기 위해 비아냥대는 입술모양을 취해주었습니다. 
그가 테리에게 손을 내밀며 덤벼들려는 찰라, 누군가 ‘어이!’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치 애타게 찾던 친구를 반갑게 부르는 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일흔은 넘어보이는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었습니다. 미소를 띈 노신사는 마치 손주를 부르듯 부드럽게 술주정꾼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이보게, 이리 와 좀 앉아보게. 나랑 이야기를 좀 하세.’하고 불렀습니다. ‘내가 왜 당신하고 이야기를 해야 한단 말이오?’ ‘자네, 무슨 술을 마셨나?’ ‘정종을 마셨는데, 내가 뭘 마시든 말든 무슨 상관이오?’ ‘아하, 그래? 나도 정종을 정말 좋아한다네.’ 노신사는 느긋하게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저녁 나와 할멈은 정종을 한 그릇 데워서 정원으로 나가지. 할멈은 올해 일흔여섯이야. 오래 된 나무 의자에 앉아 해 지는 풍경도 보고 정원의 복숭아 나무도 잘 살아있는지 살펴본다네. 그 나무는 우리 증조할머니가 심으신 거야. 자네, 복숭아나무가 얼마나 예쁜지 아는가?’ ‘나도 복숭아 나무를 좋아합니다.’ 그 사내의 목소리는 어느 새 훨씬 누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렇구만. 자네 아내도 복숭아나무를 좋아하겠구만.’ ‘아니오. 내 마누라는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 사내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난 마누라도 없고 가정도 없고 직장도 잃었습니다. 난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요.’ 노신사는 일어나 그 사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자리로 데려가 앉았습니다. ‘자, 자, 울지말게. 정말 어려운 곤경에 처했구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해보게.’ 그 덩치 큰 사내는 마치 순한 양처럼 노신사의 손에 이끌려 옆자리에 주저앉더니 그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었고 노신사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전차가 다음 정거장에 멈췄다 떠나고 테리는 역의 벤치에 앉아 방금 일어난 일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를 힘으로 제압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 그 어떤 무술보다 강력한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화평을 이루는 사랑이었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평화의 길
이 세상은 평화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평화를 이루려는 방식은 전혀 평화롭지 못 합니다. 세계 각국이 평화를 지키려 한다며 엄청난 돈을 군대를 무장하는데 씁니다. 세계 1위의 국방비 지출국인 미국은 매년 국방예산으로 1조 달러 즉 1천조 원을 씁니다. 그래서 한국의 네티즌들은 미국을 천조국이라는 별명으로 부릅니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들은 예외없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더많은 국방예산을 써서 더 강한 군대를 보유하려 애씁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평화는 요원합니다. 지금도 지구 곳곳이 끊임없는 전쟁과 분규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사람의 지혜와 방법은 참된 평화를 이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이상이 아닙니다. 평화의 근원은 어디입니까? 죄와 악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데살로니가서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평화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팔복의 일곱 째 복을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가 없는 곳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마치 이 구절을 해설해놓은 듯한 말씀이 산상설교 안에 있습니다. 5:44-45입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 구절은 팔복선언과 같이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표현을 씁니다. 어떻게 하면 말입니까? 팔복에서는 화평케 하면 그렇게 된다고 하고 여기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화평케 하는 방법,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기도는 총과 칼이 이룰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이룹니다. 총, 칼이 이루는 것은 사실은 평화를 가장한 압제입니다. 더 강한 힘 앞에 덜 강한 힘이 이를 갈며 억눌려 있는 것일 뿐입니다. 더 강한 힘이 그 힘을 잃어버리면 눌렸던 스프링이 튀어오르듯 이를 갈며 기다리던 덜 강한 힘이 튀어오릅니다. 그 결과는 더 참혹한 복수와 비극을 낳습니다. 
참된 평화를 이루는 것은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디어 보이지만, 무기력해 보이지만, 약해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가장 강한 방법이요, 가장 위대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런 방법으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곳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 모든 사람 안에는 우리의 이기적인 배우자가 있습니다. 소원해진 형제, 자매가 있습니다. 상처를 주고받은 부모와 자녀가 있습니다. 괴롭히는 직장상사와 동료가 있고 무례한 고객이 있고 우리를 속이려는 원수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이들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랑하고 기도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복음으로 이루는 평화의 길
그런데 이렇게 평화를 이루려는 이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이 죄의 파괴력이 우리 마음의 평화를 앗아가고 가정의 평화를 찢어발기고 사회와 국가의 평화를 짖이깁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해결하시는 유일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전도와 선교야말로 그러므로 참된 평화를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그런데 평화를 위해 진통을 요구합니다. 진리가 선포되면 비진리와 갈등이 일어납니다. 의가 선포되면 불의와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평화가 아닌 검과 불화와 원수됨이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복음이 선포되면 그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과 받아들이지 않은 그의 가족들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복음이 전파될 1세기 당시 유대사회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유대인 중 기독교로 회심한 이들이 나타나면 그들의 가족들은 유대사회에서 매장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회심한 가족을 설득해서 기독교 신앙을 버리도록 요구해야 했고 그가 응하지 않으면 족보에서 지우고 쫓아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정도로 과격하지는 않으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입장이 다른 가족들 간의 갈등은 그리 보기드문 일이 아닙니다. 
가족 간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접하면 우리 내면 세계 안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과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나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총독 벨릭스는 진리로 인해 마음이 흔들렸지만 버리지못한 부와 권력에의 집착으로 인해 괴로워 합니다. 평온하던 마음에 오히려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을 넘어서면 죄와 불의를 묵인하고 얻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의와 진리가 다스리는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갈등이 싫어서 진리로 인한 홍역을 거부하면 그는 영원히 거짓 평화에 속아살다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병을 고치는 과정과 같습니다. 우리 몸에 병균이 침투하면 면역시스템은 병균을 죽이기 위해 백혈구 군대를 파견합니다. 이제 백혈구 군대와 병균 덩어리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몸에 열이 나고 죽은 병균을 껴안고 죽은 백혈구 군대는 고름이 됩니다. 열이 나고 고름이 흐르는 아픔은 사실은 치료와 회복을 위해 벌어지는 전투인 것입니다. 이 전투는 생명을 살리는 전투요, 구원을 이루는 갈등입니다. 이 아픔이 싫어서 백혈구 군대가 출동하지 않으면 그 몸은 병균에게 완전히 장악당해서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갈등을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화평의 씨앗과 의의 열매
물론 복음을 전하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평화를 이루는 데 매우 더딘 길처럼 보입니다. 더딘 정도가 아니라 과연 평화를 이룰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디지만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야고보서는 말씀하십니다. 
(약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은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씨앗은 보잘것없이 작고 연약해 보입니다. 땅을 파고 흙을 덮고 물을 주면 더디지만 기적이 일어납니다. 과연 언제 올라올까 싶지만 잊고 있는 사이 어느 새 자신보다 수천 배나 무거운 흙을 밀어내고 싹을 틔웁니다. 자라나 줄기가 되고 돌덩이를 밀어내고 쪼개기까지 하며 마침내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덩이를 밀어내고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덩이도 밀어내고 우리 마음을 짖누르던 죄와 악과 미움과 불안과 두려움의 돌덩이도 쪼개어버리고 의와 평화와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평화의 열매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인 것을 선언해 줍니다. 이 믿음을 갖고 세상에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