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9 더 나은 의 / 마 5:17~20

20200119 더 나은 의 / 마 5:17~20

마 5:17-20/더 나은 의

200119 주일설교 산상설교11
법과 정신
1862년 프랑스의 작가 빅토를 위고가 쓴 소설 레 미제라블을 모르는 분은 거의 없으실 줄 압니다.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의 레 미제라블은 수많은 영화, 뮤지컬, 연극으로 변주되었으며 한국에는 장발장이란 주인공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19세기 프랑스 민중의 비참한 삶과 시민혁명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소설이 그토록 큰 사람을 받는 이유는 빈곤과 악한 구조, 죄와 구원에 관한 실천적 해법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굶주리는 일곱 조카 때문에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무려 19년을 복역한 장 발장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19년 만에 출소한 그는 하룻밤을 재워준 미리엘 주교로부터 은식기와 은촛대를 훔쳐서 달아나지만 곧 경찰에 잡혀 주교 앞으로 끌려옵니다. 미리엘 주교는 그가 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준 것이라며 경찰을 돌려보냅니다. 
이 때 주교는 적어도 두 가지 잘못을 했습니다. 첫째는 장발장의 행위에 대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둘째는 범죄를 숨겨서 공무집행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한 이들이라면 그 누구도 미리엘 주교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도덕율과 법율은 어겼지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도덕과 법의 목적인 인권과 정의를 진정으로 구현하여 절도범 장발장이 위대한 시장 마들렌으로 거듭 나는 기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구현코자 하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구현할 때에만 존재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법이 그 목적을 구현하지 못 하거나 혹은 법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목적을 구현하는 상황이 되면 법은 존재의미를 잃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 하는 이들은 분명 미리엘 주교를 비난할 것입니다. 그런 이들의 비난은 예수님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비난을 많이 들으신 예수님의 자기변호로 시작합니다. 
 
율법의 폐기자
오늘 본문은 산상설교의 본론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산상설교의 서론은 지난 주까지 살펴본 팔복과 빛과 소금의 비유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는 등 팔복의 태도로 사는 제자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빛과 소금인 제자들은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 그럼 그 착한 행실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제 본론이 그것을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은 윤리라는 말로 바꿔도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의 삶에서 윤리가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후에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착한 행실을 요구하셨는데 정작 율법에 목숨을 거는 바리새인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 랍비, 율법을 폐지하려는 도발적인 랍비라는 비난을 들으셨습니다. 마 12장과 15장입니다. 
(마 12: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5: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마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오해를 바로잡으십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의 완성자
예수님이 마치 율법을 안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히려 율법을 진짜 완성시키려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손자병법에서도 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목적을 이룰 때도 있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그 목적을 이루는 길일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율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바울 사도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목적입니다. 사랑이 목적이고 율법이 수단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율법의 조문을 지키든 않든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미리엘 주교의 거짓말은 무고한 사람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제도의 희생양이 된 장발장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었기에 인간사랑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안식명령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었으므로 역시 인간사랑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을 허용한 것 역시 겉만 씻을 뿐 내면의 악은 전혀 씻지 않는 외식을 경고하고 내면을 씻지 않고서는 정결해지지 않는다는 원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으로 참 하나님 사랑의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율법의 목적을 이루시고 완성시키셨습니다. 
 
방종과 자유
이제 제자들은 율법의 참 목적을 사랑을 구하며 율법의 형식적 규정 하나하나에 얽매이지 않는 위대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않고 달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종종 사람들을 또 다른 오해에 빠뜨립니다. 율법이 이제는 필요없다는 율법무용론에 빠질 수 있는 것이지요. 종종 사람들은 율법의 짐을 벗었다는 것만 즐기고 사랑의 실천에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손 씻는다고 내면이 깨끗해져? 부질없는 짓이야!’ 그렇다고 내면을 씻지도 않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지킨다고 하나님과 가까워져?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과 교제하는 것야.’ 그러면서 참된 예배도 드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유를 핑계로 율법의 짐만 벗어버리고 사랑의 실천을 외면하는 또 다른 극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덧붙이십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율법, 윤리가 불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얻기에 행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윤리적 삶, 행함의 열매를 무시하고 믿음, 자유, 사랑만 입으로 외치는 것은 공허한 위선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신과 실천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정신과 윤리적 실천을 모두 놓치지 않는 수준높은 의로움을 가르치셨습니다. 마 23장입니다. 
(마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계명)도 행하고 저것(사랑)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저는 교우들이 십일조에 대해 물으실 때마다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정말 십일조를 충실히 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교우들의 사정을 저보다 덜 긍휼히 여기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 사랑하기를 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를 못 할 형편이어도 하나님이 그것을 아십니다. 청혼을 하러 온 형제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살 형편이 안 되어 큐빅반지를 들고옵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해서 당신의 열 손가락 모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줄테니 나의 사랑을 받아주오.’ 진실한 사랑을 자매는 알아봅니다. 그러나 스포츠카를 몰면서 큐빅을 들고오는 이도 있습니다. ‘자기야, 진정한 사랑이 중요하지, 다이아가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현명한 자매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잖게 알아챕니다. 
 
더 나은 의
이 말은 참 사랑엔 참 실천도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의는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문자적, 형식적, 외면적 의보다 나은 참 사랑과 실천의 의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참 쉬워보이면서도 참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너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며?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며?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용서받는다며? 참 쉽다.’고 조롱하는 것을 들으면 기독교인들은 참 쉽게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참 사랑과 참 선행으로 증명되는 것이며 참된 회개는 죄를 버리는 것이지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결코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형식적 의만 행하면 된다고 믿는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제자들은 이 어려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우시려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진 짐을 당신이 대신 지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쉼을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 11장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율법의)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쉬게 하시는 방법은 첫째는 당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짐을 벗겨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율법의 짐, 윤리의 짐을 벗겨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쫓아가다보면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윤리적 삶에 이르러 빛과 소금이 됩니다. 
젊을 때 수영을 즐겼습니다. 스킨다이빙이라고 산소탱크없이 바다속에 들어가는 것도 조금 했었는데요, 어릴 때부터 숨 참는 것을 즐겨했지만 그냥 물속에서 시계를 보며 숨참기를 하면 한 50초를 넘기기가 어려웠습니다. 숨을 참으려고 하면 점점 더 호흡하지 못 하는 고통이 크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다이빙포인트에 들어가면 형형색색의 열대어들에게 정신을 빼앗깁니다. 그 열대어를 쫓아가다보면 1분을 훨씬 넘겨서 물 속에 나도모르게 머물게 됩니다.
똑같습니다. 선한 삶에만 집중하면 이기적인 본성의 우리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짐입니다. 그러나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예수님을 쫓아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비밀은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의는 어떤 것입니까? 행위에만 집중하는 바리새인의 의입니까? 게으름을 자유로 포장하는 게으른 의입니까? 참 사랑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 더 나은 의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