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1 태초부터 계신 말씀 / 요 1:1~18

20201101 태초부터 계신 말씀 / 요 1:1~18

요 1:1-18/태초부터 계신 말씀

201101 주일설교
태초부터 계신 말씀
저희 가족이 LA에 살 때 장인, 장모님이 한국에서 놀러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동부 사람들이 손님을 나이아가라 폭포에 모시고 가듯 서부 사람들은 그랜드캐년에 모시고 갑니다. 운전하고 가는 동안 과연 두 분이 그랜드캐년을 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흥미로웠습니다. 차에서 내려 뷰포인트에 올라서시는 순간 장모님은 엌, 엌 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시더니 아이구머니나 세상에, 크다 크다 해도 이렇게 클 줄을 상상도 못 했노라고 감탄을 연발하셨습니다. 한국의 아기자기한 계곡을 상상하셨다가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는, 거대한 산을 몇 개를 집어 넣어도 메우지 못 할 크기의 거대한 협곡 앞에 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도 그처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장인께서는 그 날 이후 멋진 장관에 대한 기준이 바뀌셨다고 합니다. 친구들과 이런저런 장관이나 경치를 논할 때면 어김없이 ‘그랜드캐년을 봤는가? 못 봤다면 말을 하덜 말어.’하는 말로 기선을 제압하신다고 합니다.
사위가 장모님을 그랜드캐년이라는 장엄한 광경으로 인도한 것처럼 사도 요한은 성도들을 다른 복음서가 보여주지 못 하는 장엄하고 웅장한 광경으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주의 탄생 전으로 돌아가는 놀라운 시간여행입니다. 아브라함의 족보로 시작하는 마태복음, 세례 요한의 선포와 출생으로부터 시작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의 시야를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만듭니다. 1절입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의 정체를 2천년 전 역사 속의 한 인물이 아니라 우주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조차도 미처 상상도 못 했던 크기의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된 이는 입을 딱 벌리고 엌, 엌 하는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 영광을 보았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삶이 무의미와 무기력의 늪에 빠져있다면 그 이유는 진정한 영광을 못 보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자연앞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듯 장엄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참된 경배의 삶, 예배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과 더불어 주님의 영광을 보고 참된 예배의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생명과 빛이신 말씀
오늘 읽은 본문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8절까지는 요한복음 전체의 서론이자 요약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묘사하는 첫 단어는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고스는 지혜, 원리, 정신, 이성 등 다양한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창조한 지혜이자 능력이십니다. 2-3절입니다.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이 말씀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현대과학은 우주의 기원을 164억년 전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집약된 특이점의 대폭발 빅뱅이라는 가설로 설명합니다. 이 빅뱅으로 에너지가 엄청난 힘과 속도로 팽창하며 공간과 시간, 물질과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이 이 특이점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고 설명하듯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것이 나왔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생명도 나왔고 빛도 나왔습니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생명과 빛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애를 씁니까? 빛이 없다면 이지구에 어떤 생명인들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외면당한 말씀
그러나 이 빛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하여 외면하였습니다. 9절입니다.
(요 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은 빛으로 묘사됩니다. 이 빛은 세상사람들을 비추었습니다만 사람들은 그 빛의 존재를 알지 못 했고 심지어 당신의 백성들조차도 이 빛을 외면했습니다. 이 구절은 구약시대를 묘사합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은 율법이란 형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이방인들은 물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조차도 그 말씀을 좇아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멸망할 죄인들에게 생명을 얻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육신이 되신 말씀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과 능력으로 생명의 빛을 보지 못 하는 우리의 눈을 열어보게 해주실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이 육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육신이 되셨습니다. 14절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은 예수라는 이름의 아기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로 불렸고 그 분의 삶과 사역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의 교회는 그 분으로부터 충만한 은혜를 넘치도록 받습니다.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러므로 교회는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교제하고 그 인격과 삶을 묵상하고 그 분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에 충만한 은혜 위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고 그 은혜 위의 은혜가 흘러 넘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몇 주 전 설교 후에 한 교우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설교 중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말을 듣고 마치 망치로 뒷통수를 때리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의 답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알려면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알고 연합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 14:9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경험한 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한 이는 곧 하나님과 연합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1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이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곧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심을 믿고 그 분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 순종하는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님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가득 채웁니다. 주님의 생명이 죽어있는 나의 삶을 깨워 부활시킵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와 상관없던 우리의 삶을 진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주님과의 연합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성도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마치 부부의 연합과 유사합니다. 부부는 사랑과 믿음으로 서로에게 헌신합니다. 온 마음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믿을 때 두 사람은 다른 어떤 관계에서 경험하지 못 하는 연합을 경험합니다. 이 연합에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행복감이 뒤따릅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렸던 성산 장기려 박사의 글을 소개합니다. 그는 6.25사변으로 북에 두고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결혼한 지 15전쯤 되었던 어느 날, 나는 우리 부부가 정말로 ‘참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책을 읽고 아내는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순간 나는 우리의 사랑이 육의 한계를 넘어 죽거나 헤어지더라도 영원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참사랑을 고백했고 아내도 오늘까지 그 참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서 아내와 만나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가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저 세상에서 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부부의 연합은 이것이다’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사랑으로 연합한 부부는 그것은 느끼고 경험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연합도 바로 이것이야’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 연합을 누리는 이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당신이 연합한 상태를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서…
사도 바울은 그가 경험하고 누리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부와 성자께서, 그리스도와 제자가 서로 안에서 사는 것, 이것이 연합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연합의 상태를 성령충만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연합을 누리는 길을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참된 연합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가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내 삶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넘쳐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우울과 무기력, 원망과 불평, 죄와 불의가 가득 하다면 우리는 주님과 연합은커녕 세상과 연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과 연합하는 길은 멸망의 종점에 도달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길은 영생의 종점에 도달합니다. 두 길은 서로 반대방향이며 두 길을 동시에 갈 수는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제부터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저와 함께 요한복음을 읽으시며 그 길로 들어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