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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30 축복의 통로 / 창 4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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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7:7-10/축복의 통로 180930 주일설교 요셉20 전도자의 고민  이런 고민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지인을 전도하려는데 그는 저보다 훨씬 넉넉하고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데다 심지어 인간성까지 좋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전도해야 할까요?’ 또 이런 고민도 있습니다. ‘목사님, 제 삶에는 고난이 너무 많아서 전도하려다가도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렇게 사냐는 말을 들을까봐 겁이 납니다.’ 아마 전도하려는 분들이라면 이런 의문을 한 번쯤 가져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답을 드리면 될까요? 저보다 이 질문에 대해 훨씬 답을 잘 할 수 있는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며 자랑할 만한 대단한 성취를 거둔 적도 없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굳게 믿고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는 바로 앞에 선 야곱입니다.    험악한 세월 지난 주에는 요셉의 형들이 바로를 만나고 고센에 정착하는 장면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바로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바로를 만나게 한 후 이어서 아버지 야곱을 바로 앞으로 인도합니다. 바로 앞에서 보여준 야곱의 말과 행위는 앞선 전도자의 고민에 답을 줍니다. 바로가 나이를 묻자 야곱은 이렇게 답합니다.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130세는 장수의 복을 누린 것이 분명하지만 그의 아버지 이삭의 180세,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175세에 비하면 얼마 못 된다는 말이 과장은 아닙니다. 그러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 즉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더 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집을 떠나 삼촌 라반의 집에서 많은 고생을 하고 가정생활도 평탄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일찍 잃는 슬픔도 견뎌야 했습니다. 야곱의 고백은 성도의 삶이 고난으로부터 면제된 비닐하우스에서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예수 믿는 것이 우리를 온갖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소위 삼중복음으로 예수를 믿으면 영혼도 구원받고 몸도 건강하고 만사형통한다 즉 돈도 번다는 식으로 가르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미국에서도 과거 적극적 사고방식이 최근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이름을 바꾸어 전파되는 동안 교회에서도 소위 긍정의 복음이라는 메시지가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믿음으로 성도가 이땅에서 받는 최고의 복은 성공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은 종종 많은 고난을 동반합니다. 바울 사도가 제자들에게 한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고난을 겪느냐 않느냐는 성도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는지요? 성공을 구하는 성도가 아니라 거룩을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나그네 길 야곱의 대답 중에 반복되는 단어가 눈에 뜨입니다. 그것은 나그네 길입니다.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은 조상들의 길도, 자신의 길도 모두 나그네 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정착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삶에 대한 이해는 야곱이 처음 가진 것이 물론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창 17:8) 내가 너(아브라함)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거류’라는 단어는 남의 땅에 임시로 머물러 산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임시로 머물러 살면서 그 땅이 영원한 기업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고 그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창 28:4)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이삭)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삭 역시 그 땅에 거류하여 살았고 그 땅을 언젠가 차지하게 될 날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원주민들에게 신세를 지며 눈치를 보며 때로 설움을 당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이 그 땅을 자신들에게 주실 때가 오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야곱은 당대 최강의 제국 애굽의 왕 바로 앞에 아무 것도 없는 나그네로 섰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그네로 살면서도 주인처럼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바로를 두번이나 축복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에 대한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전히 회복되어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이 땅을 상속받을 자들로서 이 땅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며 의와 사랑의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성도들의 삶입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나그네와 세상의 회복을 기다리는 상속자의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축복의 통로 요셉의 고백뿐 아니라 그의 행동도 인상적입니다. 그는 바로를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두 번이나 그를 축복합니다.  (창 47:7)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 (창 47: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축복, 복을 빈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바로를 위해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빈다는 것은 야곱이 이미 그 복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자신도 받지 못 한 복을 남이 받기를 빌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을 보면 야곱의 이런 태도가 아이러니합니다. 야곱은 지금 자기 땅도 한 평 없는 나그네로 바로가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면 흉년으로 굶어죽을 처지의 무기력한 노인입니다. 반면 축복을 받는 입장의 바로는 당대 최강 제국의 최고권력자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복을 빌어야한다면 이 최고권력자가 이 떠돌이 노인에게 복을 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바로는 야곱과 그 가족을 애굽에 받아들이고 살 땅을 주는 등 은혜를 베풉니다. 아마 야곱이 축복할 때 바로는 조금 어이가 없어 웃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닌 야곱은 왜 조금도 주저함 없이 두 번이나 바로에게 복을 비는 것입니까? 그것은 야곱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주실 땅의 약속과 더불어 자신과 후손들이 세상 모든 민족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리라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입니다.  (창 12:3) 너(아브라함)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땅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는 애굽도 예외가 아닙니다. 야곱이 지금 처지가 얼마나 곤궁한지, 바로가 얼마나 부유한지도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을 복주기를 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실제로 야곱은 그 아들 요셉을 통해 애굽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창 39:5) 그(보디발)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보디발의 집이 요셉 때문에 여호와의 복을 받았고 이것은 요셉이 갇힌 감옥에까지 이어지고 더 나아가 애굽 전체에 미칩니다.  (창 41:48)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 (창 41:54)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애굽이 이 혹독한 흉년의 구원을 받고 주변 국가들과 달리 오히려 도약할 수 있었던 비밀도 바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복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로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을 통해 결정적으로 성취됩니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주시는 참된 복의 전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전도와 선교에 나설 때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고 봉사할 때 요셉처럼 세상 모든 민족에게 은혜를 끼치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부유하냐, 얼마나 지위와 권세가 있느냐, 얼마나 배우고 뛰어나냐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복은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우리는 그 통로가 될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구원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축복하십니다. 야곱은 바로 그런 믿음으로 가난하고 무기력한 떠돌이 노인이었지만 당대 최강의 권력자 앞에서 그를 축복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세상을 축복하는 사명자로 살아가시기를 축복드립니다.

20180923 고센 땅에 살다 / 창 46:31~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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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6:31-47:12/고센 땅에 살다 180923 주일설교 요셉19 왜 이곳인가 저는 12전 LA로 들어와서 3년 후 뉴저지로 왔습니다. LA로 들어온 이유는 그 곳의 교회 청년부에서 저를 청빙했기 때문이고 뉴저지로 건너 온 이유는 우리교회에서 청빙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미국 이민 올 때 어느 지역으로 들어오셨는지요? 그 때 무엇이 그 곳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직장이나 비지니스를 해야 하는 […]

20180916 죽어도 족하니라 / 창 46: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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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6:27-30/죽어도 족하니라 180916 주일설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1997년에 출간된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은 뉴욕타임즈에서 205주 동안, 약 4년인데요, 비소설분야 베스트셀러에 머물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루게릭병에 걸려 죽어가던 모리 슈워츠 교수를 14주 동안 그 제자인 기자 미치 앨봄이 매주 화요일 만나며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죽어가는 어느 교수의 삶과 죽음에 관한 […]

20180909 이민의 땅을 향하다 / 창 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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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6:1-7/이민의 땅을 향하다 180909 주일설교 요셉17 이민의 긴장 예전에 한 교우분과 대화 중에 미국생활이 어떠냐고 여쭤보았더니 쉽지만은 않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했더니 다 정리하고 와서 돌아가기도 어렵답니다. 미국 올 때의 기대한 만큼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어서 이제는 좋으나 싫으나 여기에 적응하고 살아야지 어떡하겠냐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 혹은 남미 […]

20180902 다툼이 없는 세상 / 창 45: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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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5:14-28/다툼이 없는 세상 180905 주일설교 요셉15 시기의 무서움 유대인들의 지혜문서인 탈무드에 천사를 만난 장사꾼의 이야기를 들려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당신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당신과 경쟁하는 옆집 장사꾼이 당신이 얻은 것의 두 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100만 불을 받으면 그는 200만 불을 받게 된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

20180826 멀고 험한 화해의 길 2 / 창 4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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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5:1-13/멀고 험한 화해의 길2 180826 주일설교 요셉15 회개 없이 용서가 되는가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인 첫 남북회담 직후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남한사람들이 북한정권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예배 후 교우들이 악수하며 나가실 때 한 분이 제게 이렇게 물어오셨습니다. ‘하지만 목사님, 김정은은 회개하지 않았잖아요?’ 네, […]

20180722 우시는 하나님 / 창 43: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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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3:26-34/우시는 하나님 1800722 주일설교 요셉14 고통받는 인생 지난 주에 정말 가슴 아픈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화요일인 17일 한국 경기도 동두천에서 5살 여자아이가 어린이집 통학용 밴에 갇혀 있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등교를 위해 탄 밴에서 인솔교사가 잠든 아이를 확인하지 않고 내려 문을 잠그는 바람에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 폭염 속에서 7시간을 갇혀 있다가 사망한 채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안전벨트도 풀지 못 한 채 열기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으면 아이 몸이 다 뒤틀린 채 꺾여있었다고 합니다. 아이 외할머니가 방송 인터뷰를 하는데 아이 엄마는 계속 울부짖으며 뒹굴다가 실신하기를 반복해서 장례도 치르지 못 할 상황이고 외할머니도 한 주 전에 아이와 텃밭에 나가 나물을 캐는데 재미있다고 뛰어다니며 깔깔대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워 자신도 죽고 싶다고 합니다. 불과 2주 전인 지난 5일에도 경상남도 의령에서 3살 외손자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려던 할아버지가 아이를 차에 둔 것을 잊고 출근하는 바람에 4시간 동안 방치된 아이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있었던 터라 더 기가 막혔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부주의해서 그런 것일까? 미국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산호세주립대의 연구팀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1998년부터2017년까지 20년간 71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차내에 갇혀 열사병을 목숨을 잃었습니다. 1년에 35명, 한 달에 3명, 열흘에 1명 꼴입니다.  목숨을 잃은 아이들에게도 비극이지만 자녀를 잃은 부모는 또 어떻게 살아갈까요? 손주를 죽게 만든 할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의 얼굴을 어떻게 보고 남은 생애를 살아갈까요? 이런 일은 인간의 미련함과 부주의함, 어리석음으로 겪는 고통과 불행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이웃의 잘못으로 고통을 주고받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런 고통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 소망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베냐민 때문에 울다 계속해서 요셉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창 43장 후반부는 요셉이 형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점심 만찬을 대접하는 내용입니다. 형들이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만찬을 즐기는 중에 베냐민에게 특별하게 대접하는 요셉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베냐민은 영문도 모른 채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먼저 베냐민을 생각하는 요셉의 마음이 잘 […]

20180715 영문을 모를 인생 / 창 43: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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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3:15-25/영문을 모를 인생 180715 주일설교 요셉13 불안의 이유 현대인에게 우울증과 더불어 빠르게 늘고 있는 신경증이 불안장애입니다. 널리 알려진 공황장애라는 증상도 불안장애의 한 종류인데요. 대략 인구의 13-14%가 불안장애를 겪고 평생 1회 이상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은 인구의 30%에 달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불안해할까요?  프랑스의 작가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그의 책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의 여러 가지 원인을 소개하는데 그 중 하나가 불확실성입니다. 전통사회에서 신분과 삶의 수준은 대개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있고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의 귀족이나 동양의 양반 모두 어지간히 중죄를 짓거나 망나니짓을 하지않고서는 여간해서 신분과 부를 잃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서민이나 천민들도 비록 삶이 고단하긴 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 신분과삶의 처지 때문에 불안할 일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신분의 굴레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삶의 수준도 상당부분 스스로가 획득해야 합니다. 노력여하에 따라 더 높은 생활수준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 말은 동시에 자칫잘못하면 더 낮은 생활수준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불안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불확실성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소개하는데 첫째, 변덕스러운 재능입니다. 큰 히트곡을 냈지만 더 이상 히트곡을 내지 못 하고 잊혀지는 것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가수들이나 아이템을 하나 성공했지만 계속 해서 그런 성공적인 비지니스를 하지 못 해 불안한 비지니스맨들이 그 예일 것입니다. 둘째는 운입니다. 도대체 왜 남들이 안 걸리는 병이 내게 걸리고 남들은 성공한 아이템이 내가 시작하니까 사양길에 접어드는지 예측할 수 없는 운을 말합니다. 셋째는 고용주, 넷째는 고용주의 이익, 마지막은 세계경제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내 마음대로 안 되며 운은 예측할 수 없고 고용주와 세계경제상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우리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안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님, 일이 잘 되어 가는데도 왠지 불안해 잠을 못 잡니다.’ 이런 상담을 드물지않게 합니다. 불안을 느끼는 우리에게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치시는 걸까요?    불안한 인생 창세기 43장 중반부를 읽었습니다. 이 대목은 이집트에서 사온 양식이 다 떨어져 불가피하게 다시 양식을 사러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내려온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총리의 호의를 얻기 위해 예물을 마련하고 양식값도 갑절로 준비하여 베냐민과 함께 이집트의 총리 앞에 서는데 요셉이 그들을 자신이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먹도록 합니다. 최고권력자에게 식사초대를 받았고 분명 이것은 호의의 표시인데 그들은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불안해합니다. (창 43: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그래서 그들은 요셉의 청지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가 소개됩니다.  (창 43:20)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창 43:21)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창 43:22)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 ‘알지 못 하겠다! 분명히 우리가 양식값으로 지불한 돈이 왜 도로 자루 안에 있지? 누가 넣었지? 모르겠다!’ 도무지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무지, 불확실성이 지금 이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똑같이 겪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미래를 모릅니다. 사업이 잘 될지 안 될지, 병에 걸릴지 안 걸릴지, 자동차 사고가 나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을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무런 사고를 겪지는 않을지, 뉴스에 나오는 불행한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현재의 이유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안 걸리는 병에 나는 왜 걸리는지, 다른 사람 비지니스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왜 나만 힘든건지, 다른 자녀들은 공부도 잘 하고 착한 것 같은데 왜 내 자녀는 이렇게 힘이 드는건지 모릅니다. 원인을 알면 속이라도 시원하고 무슨 대처라도 해보겠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현상 너머의 차원들 자, 그럼 이 형제들은 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여러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차원은 청지기의 차원입니다. 그는 요셉의 명으로 형제들 몰래 돈을 다시 자루에 집어넣은 사람이므로 돈이 어떻게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갔는지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그도 모릅니다. 둘째 차원은 요셉의 차원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반응을 보려고 돈을 도로 집어넣도록 명령하였으니 왜 돈이 도로 자루 안에 들어가야 했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그 이상은 모릅니다. 마지막 차원은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자루 안에 들어간 이유와 과정 뿐 아니라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지, 이 일을 통해 어떤 놀라운 일을 또 하실 것인지까지 모두 아십니다. 이 형제들이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현상 뒤에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일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하나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아야 하는데 청지기나 요셉의 차원에서벌어지는 일도 모르는 그들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빙산의 90%는 물 속에 잠겨있어 보이지 않듯이 실재 벌어지고 있는 일의 대부분을 우리는 알 수 없고 극히 일부의 표면 밖에는 못 본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가 직장을 잃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시기하는 상사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그의 자리에 사장의 친척이 낙하산으로 내려와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와 아무 상관없이 회사가 어려워져 부서마다 한 명씩 감원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에는 중국에서 수입하던 원자재 값이 올랐을 수 있습니다. 혹은 뉴저지의 세금제도가 바뀌면서 회사의 재정상태가 어려워졌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주력 판매처인 중미의 정치상황이 불안해져 판로가 막혔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래처가 부도나면서 회사가 받을 돈을 못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세계경제가 신자유주의에서 보호무역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의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배후에는 자원남용으로 인한 환경파괴와 생산비용의 증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사건 뒤에도 수백, 수천가지 변수가 작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인간이 어떻게 다 쫓아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가 아는 것은 실재와 거리가 멉니다.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설명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동시에 교만한 지를 떠벌리는 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욥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

20180708 떨칠 수 없는 추격자 / 창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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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50:15-21/떨칠 수 없는 추격자 180708 주일설교 요셉12 쉬지 않는 추격자 지난 2004년 한국의 전북 익산 경찰서에 초췌한 모습의 40대 남자가 자수하러 와서 21년 전 자신의 큰 형을 죽인 죄를 고백했습니다. 당시 교도소에서 출소한 큰 형이 매일 술을 마시고 가족들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집과 재산마저 마음대로 처분하려고 하자 격분한 나머지 둘째형과 공모하여 큰 형을 흉기로 살해하고 […]

20180701 잃으면 잃으리라 / 창4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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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3:1-14/잃으면 잃으리라 180701 주일설교 요셉11 움켜쥠 평화가 서너 살 때였던 것 같습니다. 장난감 가게에 가서 마음에 드는 로봇을 하나 골랐습니다. ‘아빠가 사줄게. 이건 평화 거야.’ 계산대 앞에서 평화에게 장난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장난감을 꽉 움켜쥐는 겁니다. 아빠가 사준다고 했잖아? 그래, 사주는거야, 그러니까 아빠를 줘. 무슨 소리야? 사준다면서 왜 뺏어가? 아, 이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