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1:24/케냐의 하나님
231126 주일설교
1. 이동관 선교사
(영상1) 방금 보신 영상은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 근처의 오지 마사이부족의 땅 모를로교회 성도들의 기도모습입니다. 이 지역은 미국의 인디언보호구역과 비슷한데 100% 마사이족만 사는 오지로 포장도로가 있는 마을에서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려서 들어가야 도착합니다. 지난 주 보고드린 탄자니아에 이어 이 지역에서 사역 중인 우리교회 케냐협력선교사이신 이동관 선교사님을 뵙고 왔습니다. 제가 걸고있는 이 목걸이는 마사이족의 전통장신구인데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선교사님은 케냐의 오지마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공동체를 일구는 사역을 19년 째 해오시면서 네 곳의 오지공동체를 개척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개척한 곳이 나이로부 북부의 춤부니 마을의 캄바부족이었습니다. 다음이 소소마 마을의 캄바부족이었습니다. 이 두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만들어 현지 지도자들에게 위임한 후 5년 전부터 세 번째로 개척을 시작한 지역이 앞서 보여드린 영상의 마시이부족의 마을 모를로였습니다.
2. 모를로교회
앞선 두 곳에서처럼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들판에 싯딤나무 아래 텐트로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주변지역의 마사이족을 방문하여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싯딤나무는 현지에선 아카시아나무라고 부르는데 구약성경에 법궤를 만든 바로 그 나무입니다. 사진을 보면 주변에 마사이족이 어디 있는가, 싶으실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모를로 교회를 방문하고 왜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교회를 세웠냐고, 교인들이 어디서 오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선교사님이 웃으시면서 저기 보라고 하는데 저기 지평선 가까이 집이 한두 채가 보였습니다. 이 쪽도 보라고 저 산등성이에 집이 또 한두 채가 보입니다. 마사이족은 유목을 하는 이들이라서 이런 광야에 한두 시간씩 걸어가야 집이 한두 채씩 있고 끝도없는 들판에 양떼, 소떼를 몰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모두 최소 한두 시간씩 걸어오고 선교사님도 여기에 텐트를 치고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며 한 집, 한 집 방문하고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매일 라면을 끓여먹고 밥을 해먹으며 현지인 스텝 한 명과 텐트생활을 3개월 정도 하는 동안 가장 어려운 것은 밤의 살을 에는 추위와 밤마다 울어대는 하이에나들이었습니다. 3개월을 텐트생활을 하던 중 후원금이 들어와 양철집을 지어서 숙소를 삼고 이 곳에서 2년을 지냈습니다. 이 양철집은 추위와 들짐승의 위험을 막아준 대신 새로운 적을 데리고 왔는데 바로 빈대떼였습니다. 새벽 2시쯤이면 온 몸이 빈대에 물려 견딜 수 없는 가려움과 고통으로 일어나 긁노라면 상처가 터져 피가 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고생을 견디며 마침내 양철로 교회를 세우고 전도한 마사이족과 감격스러운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전통토속신앙에 물든 이들이지만 자신들의 마을로 찾아와 함께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선교사님의 전도로 하나 둘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후원금이 들어와서 현재의 멋진 모를로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제가 이 지역을 방문한 날 마침 이선교사님이 교인들과 마사이족장들이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동관 선교사님께 54에이커의 땅을 줄테니 마사이족을 위한 커뮤니티사역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자리였습니다. 처음에는 외국인이 자기들 땅에 무얼 노리고 들어왔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이들이 5년 동안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이선교사님을 보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사역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회의 후에 한 교회성도가 초청하여 마사이족의 집을 방문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성도는 아내가 넷에 자녀가 29명이 있는 유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진 속에 셋째 아내와 넷째 아내와 아들들이고 뒤에 보이는 소똥과 지푸라기를 이겨서 만든 집이 네 채가 있습니다. 집 한 채가 여러분 집의 안방만 한데 거의 10명 가까이가 한 집에서 잡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옥수수를 갈아서 만든 백설기같은 떡밥에 양념을 한 야채를 얹고 귀한 손님이 왔기에 고기도 몇 점 올려서 파리떼를 쫓아내며 먹었습니다.
3. 케냐를 품다
이런 식의 오지개척을 이선교사님은 19년 동안 벌써 네 번째 다른 지역에서 각각 해오신 것입니다. 제가 짧게 소개했습니다만 이런 고생스러운 오지개척을 왜 하시는 것일까요? 이동관 선교사님은 신학대학원 재학시절부터 선교사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들이 하는 것일줄 알고 선교사가 되리란 생각은 꿈도 꾼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캠퍼스에 붙은 견습선교사 모집광고를 보았는데, 1년 동안 학교를 휴학하고 선교지에서 소위 인턴선교사가 되어 현지선교사님을 돕고 사역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광고에서 보고는 얼룩말이 뛰어놀고 어디나 바나나가 주렁주렁 열린 낭만적인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 세계를 한 번 경험하고 졸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생각에 덜컥 지원하였습니다.
막상 케냐에 발을 들여놓은 선교사님이 본 아프리카는 상상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케냐의 빈민촌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을 도와 교회를 섬겼는데, 초등학교 2학년생인 레베카의 엄마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님과 함께 병문안을 갔습니다. 허름한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가 살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에 파리가 들끓는 얼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데 의사말이 에이즈라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애 아빠는 어디 있나요? 잠시 후 들어오는 그를 보니 더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하반신이 없는 장애인으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들어왔습니다. 엄마를 잃으면 저 어린 소녀가 저 장애인 아빠 밑에서 어린 동생까지 데리고 어떻게 살까 기가막혔습니다. 돌아오는 차에서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한 아이의 동생이 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병원에 달려갔더니 네 살된 여자아이가 동네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해 실려왔다는 것입니다. 기가막혀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화를 냈더니 케냐의사가 담담한 말투로 흔히 있는 일이니 흥분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좋은 집 화장실보다 더 작은 양철집에 일곱, 여덟명이 사는데 부모가 낮에 돈벌러가면 아이들은 고스란히 온갖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1년의 견습선교사 사역을 마치고 돌아와 3년의 공부와 7년의 부교역자 생활을 하는 동안 케냐의 아이들의 모습이 내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선교사가 되리라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목사님은 케냐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케냐를 놓고 기도하다가 어느 새 케냐에 돌아가는 것이 기도제목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침내 10년 만에 아내와 어린 세 딸을 안고 케냐에 돌아온 선교사님은 가족을 나이로비에 남겨두고 자신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마을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길도 없는 오지마을로 들어갈 때면 이선교사님의 마음이 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는 현지인교회도 있고 나 말고도 복음 전할 선교사들이 많겠지, 하지만 길도 제대로 없는 이 오지에는 누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뛰고 설렌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19년 동안 네 곳의 오지마을 교회개척과 공동체사역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이선교사님은 누가 등떠미는 것도 아닌데 고생과 어려움을 사서 하십니까? 그 이유는 감옥에 갇혀서도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아니 왜 사울은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그것이 왜 기쁘고 거기다더해 고난을 더 받겠다고 합니까? 속된말로 미친 것 아닌가요? 그 이유는 그가 진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빚은 십자가에서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에게 진 사랑의 빚입니다. 이 빚을 갚기 위해, 아무리 고난받아도 다 못 갚을 빚이기에 교회와 성도를 위해 고난받음으로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기쁘고, 더 고난받아 더 갚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선교사님은 왜 아무도 등떠밀지 않는데 케냐로 돌아갔습니끼 왜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데 오지로 오지로 들어가서 추위와 들짐승과 빈대와 싸우면서 낯선 이들과 동거동락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선교사님 역시 예수님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빚을 생각하노라면 자신도 복음과 문명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이들에게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이를 위한 고난이 조금도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경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집니까?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아무 빚이 없기 때문에 억울합니다.
5. 와소니로 비전선교캠프
앞서 보신 모를로를 세 번째 오지로 택하여 개척을 시작하고 3년이 지나 마침내 모를로 교회당을 건축하고 기독교공동체를 탄탄하게 세운 2022년 하나님은 이선교사님을 와소니로 마을로 인도하셔서 네 번째 개척을 시작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마을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는 과정을 영상으로 보시겠습니다. (영상2)
여러 교회의 후원으로 땅을 구입하고 기다렸다가 후원금이 모이면 예배당을 짓고 또 모이면 교실을 짓고 지금은 5에이커의 땅에 교회, 식당, 기숙사, 유치원, 초등학교, 놀이터, 기숙사 등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네 곳을 개척하고 건축하다보니 선교사님이 이젠 거의 건축가가 다 되어 직접 설계하고 시공하고 현지 직원들을 지휘하며 다 짓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탄자니아에서처럼 케냐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잃은 영혼을 구원하고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고 교회를 일으키시고 계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선교사님은 예수님의 사랑의 빚을 갚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에게 진 사랑의 빚을 다 갚았습니까? 아직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도를 위한 당하는 고난을 기뻐하며 사랑의 빚을 갚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행 15:22-29/성령이 이끄시는 교회
231203 주일설교
1. 재신임투표 문의
많은 교우께서 다음 주의 담임목사재신임투표에 관심이 많으실 줄 압니다. 지난 주간에 투표자격과 명단확인에 대한 문의가 많았습니다. 추가로 설명을 드리자면, 제직회와 달리 공동의회는 18세 이상 세례받은 등록교인이면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본인이 자격이 있다 생각하시는 분들은 다음으로 하실 일이 교회홈페이지에 있는 교인등록명단에 본인의 성함이 있는지, 있다면 여러분이 들고오실 아이디와 성함이 같은지를 반드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문의가 많아 추가로 오는 수요일 6일 자정까지 확인기간을 연장하니 그냥 맞겠지,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댁에 가셔서 반드시 확인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있고 맞으려니 생각했다가 명단에 없거나 성함이 다르면 확인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수도 있고 투표에 참여못하실 수도 있다는 점 다시 한번 강조드립니다.
지난 주와 달리 이번 주에 새로 올린 명단에는 한글이름과 더불어 영어이름이 있는 경우 옆에 나란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여러분의 아이디 성함이 한글이름과 영어이름 둘 중 하나와 일치하면 됩니다. 라스트네임이 결혼 등으로 성이 바뀌어 등록되지 않았는지 확인해 주시고요, 아이디에 미들네임이 이니셜로만 표기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김도완을 영어로 표기하면 Dowan Kim 이라고 하지 않고 Wan의 이니셜로 W만 써서 Do W Kim이라고 하는 식인데요, 이 경우 사진이나 선관위의 판단으로 본인확인이 가능하지만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이메일로 아이디의 기록된 이름을 알려주시면 더 신속하게 본인확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튼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는 분들은 사무실 이메일로 알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
당일에는 어떤 절차를 거치는가? 예배당에 오시면 약 25분 전부터 로비에서 본인확인을 먼저 하셔야 합니다. 4개의 테이블을 라스트네임 성을 가나다순으로 배치하였으니 해당 테이블에 가셔서 본인의 성함 혹은 고유번호 혹은 둘 다를 알려주시고 아이디를 보여주시면 확인증을 써드립니다. 이 확인증을 예배당 입구의 투표지배부테이블에 제출하시고 투표지를 받아서 예배당에 들어오시면 됩니다. 혹 줄이 길거나 늦어서 예배가 시작하면 바로 들어오셔서 예배를 드리시고 예배 중 공동의회가 선언된 후 다시 나가셔서 같은 절차로 투표지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시간은 넉넉히 드리니 모두가 참여하실 수가 있습니다. 공동의회시간에 투표지에 찬성 O, 반대 X를 기표하셔서 접어서 손을 들어주시면 투표함을 든 진행위원이 다가갈테니 투표지를 함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투표함은 예배당에서 밀봉한 후 새가족실에 보관하고 오클랜드 예배당에서 3시부터 개표하여 교회 홈페이지에 결과를 발표합니다.
2. 재신임을 넘어선 문제
우리교회는 2012년 제정한 내규에 따라 담임목사는 7년 임기로 사역하며 매 6년째에 재신임투표를 통해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임기를 연장합니다. 찬성이 그에 이르지 못 하면 7년째를 안식년으로 가지고 사임합니다. 2009년 9월부임한 저는 2010년에 위임투표를 받았고 2016년에 첫 번째 재신임투표를 받았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과거 위임투표와 재신임투표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그 때와 달리 명단확인부터 모든 절차가 까디로워졌다고 불평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이번 재신임투표의 공정성을 염려하는 분들이 많아서 부득이 취하는 조치입니다. 왜 예전과 달리 투표의 공정성, 엄정성을 염려하는가? 이는 잘 아시다시피 최근 불거진 교회내 갈등 때문입니다.
작년말 반주자소송관련 제직회로부터 비롯되어 최근까지 점점 증폭된 교회내 갈등상황에 대해 담임목사로서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교회의 리더이자 책임자로서 모든 상황을 잘 대처하지 못 한 저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인해 재신임투표를 앞두고 찬성과 반대를 주장하는 교우들의 반목이 커진 것 역시 저의 잘못이 큽니다. 이에 저는 양측의 교우들과 사태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모든 교우들께 감히 당부를 드리고자 합니다.
김도완 목사 재신임 통과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울 분들이 많겠지만 이는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통과된다고 우리 교회에 꽃길만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안 된다고 교회가 크게 잘못되는 것도 아닙니다. 목사는 언젠가 교회를 떠나야하는 일꾼일 뿐이므로 지금 떠나나, 7년 후 떠나나 혹은 은퇴할 나이가 되어 떠나나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도 없이 15년 전 뉴저지장로교회를 섬길 특권을 얻었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김도완 목사보다 우리 교회를 더 잘 섬길 목사들이 당연히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염려해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목사의 재신임여부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교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에서 일개 목사의 재신임여부는 정말 사소한 문제일 뿐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외면한 교회는 재신임이 되든 안 되든 큰 문제거리가 됩니다. 교회는 목사가 인도하는 곳이 아니라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그럼 우리교회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말씀입니다. 계시록을 들어보십시오.
(계 2: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님은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교회를 탄생시키신 성령님은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살아서는 성령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전했고 죽은 후에는 그들이 기록한 복음서와 서신서를 교회에 남겼습니다. 사도가 세상을 떠난 후 교회는 사도들의 권위를 안수를 통해 위임받은 교부들의 설교를 통해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성령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전통을 좇아 오늘날에도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안수를 받은 목사는 성경을 설교함으로써 성령님의 말씀을 교회에 전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교회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는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그 은혜를 누립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는 사명을 깨닫고 순종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는 고난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깁니다.
이 말씀을 성령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는 순간 교회는 구별됨 곧 거룩함을 잃어버립니다. 이름은 교회지만 세상원리로 돌아가는 세상의 모임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거룩함은 곧 구별됨을 의미하고 그 모임은 교회로서의 거룩함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늘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그 인도를 받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성령님의 음성이 아닌 인간의 생각과 욕심에 이끌림을 받지 않는지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귀는 교회를 항상 성령님으로부터 떼어놓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고자 노리기 때문입니다.
4. 질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성령님이 교회를 인도하시는 둘째 방법은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입니다. 이 진리를 가르쳐주는 오늘 본문은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배경으로 합니다. 행 15:1-2을 보십시오.
(행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이방인)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행 15: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자칫 잘못하면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의 갈등으로 번져 큰 분열을 불러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판단을 예루살렘교회에 의뢰하면 어떻게 합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예루살렘교회 교인들 편을 들지 않으리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런데 안디옥교회 지도자인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에 이 문제를 의뢰하러 떠납니다. 왜입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가진 어머니교회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역시 격론이 벌어졌지만 바나바와 바울의 증언을 신중히 듣습니다. 12절입니다.
(행 15:12) (예루살렘교회의)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그리고 지도자인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장로가 정리합니다. 7절과 13절을 보십시오.
(행 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
(행 15: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리고 두 지도자의 정리를 온 교회가 받아들여 안디옥 교회에 편지합니다. 무엇이라 썼는지 보십시오. 28절입니다.
(행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결정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성령과 우리입니다. 곧 예루살렘 교회는 이 결정을 성령님과 함께 내렸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어디에 계셨습니가? 15장에 내내 초월적인 현상은 없었습니다. 많은 격론이 있었고 이를 예루살렘 교회에 의뢰하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의 현명한 판단이 있었고, 바나바와 바울의 자세한 보고와 신중한 청취와 이성적인 토론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판단과 이를 존중하는 교회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정리한 교회는 결정과정에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즉 성령님은 당신이 세우신 교회 지도자의 권위와 질서의 존중을 통해 교회를 인도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이 인도로 자칫잘못하면 크게 갈등하고 분열할 뻔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질서와 연합과 존중을 회복했고, 동시에 이방선교의 문을 활짝 열어 복음이 온 로마제국에 장애물없이 전파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십시오.
(고전 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 14: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5. 회복을 바라보는 교회
성령님은 이 질서를 통해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권위와 질서를 존중함으로써 성령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이 질서의 존중이 사라지는 순간 교회는 역시 구별됨 곧 거룩함을 잃어버립니다. 힘과 욕심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임과 다를바 없는 모임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이지 중요한 것은 여기 목사 한사람이 재신임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뉴저지장로교회가 교회됨을 잃지 않으려면 말씀과 질서를 통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님의 인도로 이 모든 갈등과 위기를 극복하고 새시대로 나가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바라볼 분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땅의 갈등과 분열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들어 교회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행 12:1-5/살든지 죽든지
231210 주일설교
1. 하나님의 뜻
투표하느라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재신임투표는 7년 전과 달리 많은 교우들이 정말 힘드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책임자로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투표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오후면 홈피에 실리겠지만 벌써 궁금하시죠? 제가 미리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번 재신임투표는 통과되거나 안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 뜻일까요? 통과일까요, 부결일까요? 그 답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같이 본문을 들여다 보시지요.
2. 다른 운명의 이유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겪은 박해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기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자 교회를 박해합니다. 먼저 야고보를 잡아서 사형시킵니다. 이어서 베드로도 잡아서 가두고 다음날 아침 사형시키려 합니다.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천사가 개입하여 기적적인 방법으로 베드로는 감옥을 나와서 안전한 곳으로 피합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야고보가 잡혔을 때는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면 왜 야고보는 순교하고 베드로는 구출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야고보를 위한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베드로를 위한 기도만 들으셨기 때문입니까? 야고보는 베드로만큼 사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까?
3. 다른 사명때문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고보나 베드로나 똑같이 사랑하셨습니다. 두 사람의 다른 운명은 그들의 다른 사명때문입니다. 곧 야고보는 순교로서 감당할 사명이 있었고 베드로는 살아서 감당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는데 무슨 사명을 감당합니까? 먼저 순교한 스데반의 가르쳐 줍니다. 스데반의 탁월한 은사는 그의 죽음으로 낭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의 당부대로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세계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사도 바울을 회심시키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숭고한 마지막 모습은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울이 회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습니다. 누가가 자세히 기록하지는 못 했지만 틀림없이 야고보의 순교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하게 쓰였을 것입니다.
반면 베드로는 살아서 감당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수제자로서 주님의 말씀과 삶을 교회에 가르칠 뿐 아니라 박해의 파도를 교회가 견뎌낼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둘 중 어떤 사명을 택하고 싶으세요? 우리에게 택하라면, 죽은 정승보다 산 개나 낫다고 아마 백이면 백 야고보가 아닌 베드로를 택할 겁니다. 그럼 베드로가 되면 더 좋을까? 그러나 요한에 비하면 베드로도 빨리 죽습니다. 베드로는 약 65년경 순교했지만 요한은 100년경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도 요한에 비하면 훨씬 빨리 순교한 것입니다. 요한의 사명은 에베소 선교와 요한서신의 기록에 더해 무엇보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두 사도 중 유일하게 나이들어 죽음으로 순교했습니다.
4. 살든지 죽든지
성도는 모두 사명때문에 다른 길을 갑니다. 야고보처럼 일찍 순교할수도, 베드로처럼 나이들어 순교할수도, 요한처럼 장수하고 순교할수도 있습니다. 성도는 오래 살았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고 일찍 죽었다고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재신임이 통과되었다고 제가 성공했거나 찬성한 이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 아닙니다. 통과되지 않았다고 제가 실패했거나 반대한 이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도 아닙니다. 통과되었다면 제가 아직 우리교회에서 감당할 사명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를 안정시키고 치유하는 데 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통과되지 않았다면 우리교회에서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라시는 음성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과되든 않든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쪽이든 겸손히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좇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사명자로 삽니다. 그렇지않고 결과를 자신의 성공과 실패로 여기고 성공했다고 기고만장하고 실패했다고 분노하면 사명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로 삽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해 산다한 바울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입니다.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명자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